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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성경지명  작성일  2006-12-29
 제목  게셀(Gezzr)
 주제어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뜻 : 분깃 

 

아얄론 골짜기와 소렉 골짜기 사이 가나안인의 중요 도시. 고대 게셀른 스블라의 북서쪽 변방에 위치하였다. 그곳은 평지로서 동부 지중해 연한의 여러 나라를 남북으로 잇는 주요한 통로였다(느6:2).

 

(1) 여호수아가 진멸함(수10:33).

(2) 다윗이 이곳까지 블레셋인을 쫓아갔다(삼하5:25 대상20:4).

(3) 애굽바로솔로몬왕에게 준 후 솔로몬이 건축(왕상9:15-17).

(4) 일명 벨호론(수16:3).

 

1, 게셀의 위치 확인

성경에서 말하는 게셀은 Tell Jezer(또는 Tell el-Jazari)로 확인되었다. 이곳은 라믈레(Ramleh)로부터 남쪽으로 남동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현 위치가 게셀일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졌던 사람은 C. Clermont-Ganneau 이다. 이때가 1871년 이었고, 2년후에 유명한 "게셀 경계" 문구가 적힌 돌판을 발견하였다. 이 석판은 "게셀의 경계는..."이라고 적혀있는데, 헤롯 대왕 시기의 글자체와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러한 발견으로 게셀의 위치에 대한 논란을 종결지었다.

2, 게셀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

게셀은 유다 "평지"(히; 쉐펠라=낮은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평지 지역의 북쪽 끝부분에 해당하며 해발 225 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지만 주변이 탁 트인 돌출 지역이어서 360도 전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게셀은 해안을 따라 지나가던 국제 도로를 지키는 역할을 하였던 곳 일뿐만 아니라 아얄론 골짜기로 접근하는 길목을 관할할 수 있던 곳이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주변에는 아주 비옥한 아얄론 평야가 있어서 농지가 풍부하였고 게셀이 위치했던 산언덕 아래 쪽으로 아주 풍성한 샘물들이 있는 곳이다.

게셀이 가장 먼저 언급된 문서는 이집트왕 투트모세 III 세(c. 1490-1436 BCE)의 원정 기록이다. 카르낙에 있는 아몬 신전의 벽화에 남아있다. 이 벽화에 묘사된 것에 의하면 투트모세의 첫 번째 아시아 원정(c. 1468 BCE)에서 게셀이 정복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투트모세 IV세(c. 1410-1402 BCE)가 테베에다 만들었던 자신의 신전 벽화에 보면 후리족을 어떤 도시에서 사로잡아온 내용을 적어놓았는데 도시 이름이 손상되어있기는 하지만 게셀이었던 것으로 판독하고 있다.

14세기 무렵의 엘 아마르나 시대에는 게셀이 가나안 도시였으며 이집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 나타난다. 386개의 아마르나 문서 가운데 10개가 게셀에서 보내진 편지였으며 각각 다른 세명의 게셀 왕들이 확인된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성서 밖의 자료에서는 최초로 언급된 메르넵타 석비에도 게셀이 언급되어있다. "이스라엘을 격퇴하였고 게셀을 정복하였다"라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셋 III 세의 원정 기록에보면 Ga-az-ru 라는 도시를 정복한 것이 있는데, 게셀이 정복된 것임이 분명하며 아마도 734-733 BCE 무렵 블레셋 원정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호수아 10장에서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 왕을 도와주려고 왔다가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패배하고 호람과 그의 군대를 죽인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게셀 성을 정복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다만, 여호수아 12장에서 게셀 왕이 이스라엘이 멸한 31개의 가나안 왕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나중에 요셉 지파, 특히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으로 할당 되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수 16:5-10; 삿 1:29; 대상 6:67; 7:28),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라는 첨가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게셀을 소유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 21:21에서도 레위 사람들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윗 시대의 게셀이 누구의 영역이었는지도 역시 모호하다. 다윗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서 불레셋 사람들을 게셀까지 쳐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삼하 5:25, 대상 14:16), 블레셋과 게셀에서 전쟁을 하였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대하 20:4). 이러한 기록들에서 게셀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적으로는 블레셋 사람들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왕상 9:15-17 기록에서 게셀이 솔로몬의 영역으로 "바로의 딸과 결혼하는 선물"형태로 넘어오게 되는데, 이곳을 솔로몬이 요새화 하였다는 기록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솔로몬하솔므깃도와 더불어 게셀을 요새화하였던 것이다.

게셀은 마카비 전쟁 당시에 다시 한 번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데, 셀류커드 왕조의 장군 바키데우스가 게셀을 요새화 하였으며(마카베오 상 9:52), 142 BCE에 시므온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시 성벽을 재건하여 자신을 위한 왕궁을 지었다(마카베오 상 13:43-48). 그의 아들이었던 존 히르카누스는 유대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된 다음에 게셀을 자신의 헤드쿼터로 만들었다(마카베오 상 13:53).

3, 게셀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대하여

첫 번째 고고학 발굴은 1902년과 1909년 사이에 R.A.S. Macalister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는 1912년에 출판되었다. 이 때의 발굴은 동쪽 끝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트랜취를 파들어갔으며, 거의 바닦까지 발굴이 이루어졌다(어떤 곳은 깊이가 13 미터 내려간 곳도 있다). 한 트랜취 발굴이 끝나면 다음 트랜취 발굴 지역에서 나오는 흙들을 이미 파놓은 곳에다 들어붓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발굴 기술이 원초적인 단계이기는 했지만 아홉 층의 시대 구분이 확인 되었다.

두 번째 발굴은 1934년 A. Rowe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의 발굴은 서쪽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본래 회교인들의 공동묘지 지역이어서 전 발굴 기간 동안에 발굴이 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발굴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닦층이 드러났기 때문에 발굴은 지속되지 않았고, EB 시대의 무덤과 MB 시대의 망대가 발굴 유적들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이래로 G.E. Wright를 시작으로 지속되어온 발굴은 1964-65년은 Wright가, 1966-71년은 W.G. Dever가, 1972-74년은 J.D. Seger와 H.D. Lance 가 각각 발굴을 이끌었고 Glueck가 1964-71까지 조언자로 활동하였으며, Dever가 마지막 발굴 기간인 1984-1990년까지의 발굴을 이끌었다.

시대별로 살펴본 고고학 발굴 결과는 최종적인 발굴 결과를 근거로하여 26 층의 시대적 구분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금속병용기 시대; 바닦층의 갈라진 바위 틈 사이에서 가술-브엘세바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세라믹이 출토됨에 따라 가장 먼저 이곳에 사람이 시작했던 시기는 금속병용기 시대로 확인되었다(c. 34 century BCE).

② 초기 가나안 시대 ; 성벽을 갖추지 않은 셈족 계열의 초기 주거자들의 흔적이 동굴 주거지와 무덤들에서 확인되었다. EB II 시대에는 일반 가옥 구조들의 모습도 살펴 볼수 있으며, EB IIIA 시대에 마을이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③ 중기 가나안 시대; 게셀 도시가 가장 번성하였던 때이다.

A, 성벽; MB IIIB-C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확인되었다. 400 미터 가량이 발굴되었으며 사각 망대가 함께 건설되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8개가 1902-1909년 발굴에서 확인 되었으며, 1934년에 1개가 추가 되었다. 전체 성벽의 규모로 보아 대략 25개 이상의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서 성문이 발견되었다.

B, 신전; 10개의 돌기둥이 나란히 늘어선 신전이 발견되었는데, 어떤 것의 돌기둥의 3 미터 이상이나 되는 것도 있다. 바닦은 포장되어 있었으며 벽면은 넓적한 돌들로 덧입혀서 건설되었던 형태로 밝혀졌다.

④ 후기 가나안 시대; LB IA시대(15세기 초엽)의 잔해가 드물게 발견되는 것으로보아 투트모세 III 세의 원정 이후에 도시가 부분적으로 방치되어진 것처럼 보이며, LB IB시대의 흔적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이 무렵은 생활 환경이 아주 어려웠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사이프러스이집트 토기들 그리고 상아 제품들이 발련되는 것으로 보아 국제적 교류는 계속되었었고 단지 성벽이 재건되지 않은 형태의 허술한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투트모세 IV세의 원정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 외벽; LB IIA시대(14세기)에 도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 시기는 엘 아마르나 시기와 일치한다. 성문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략 1,100 미터 가량의 성벽이 확인되었다. 성문의 위치는 아마도 솔로몬 시대의 성문 아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B, 수로 시설; 7 미터 깊이와 45 미터 길이로 내려가는 터널 형태의 수로 시설이 이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단서가 없다. 따라서 어쩌면 하솔므깃도, 그리고 기브온 시대의 것과 일치할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LB IIB(13세기)시대에는 게셀이 쇠퇴기를 맞는다. 제 15 지층의 파괴를 지엽적인 파괴와 연루시켜 해석하기도 하는데, 종합적으로 보면 상부 지층에서 발견되는 블레셋 토기의 출토 현상과 연관시켜서 어쩌면 메르넵타(1207 BCE)에 의한 원정이나 블레셋 사람들에 의한 원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⑤ 제 1 철기 시대; 제 8 지층부터 11 지층 까지는 블레셋 사람들과 관련된 곳으로 밝혀졌다. 9-10 지층의 경우는 성경의 기록처럼 이집트 왕이 불살랐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시대로 보이며 21왕조의 시아문(Siamun)이 관련자로 보여진다.

⑥ 제 2 철기 시대; 솔로몬 시대에 건축된 성벽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924 BCE에 시삭의 침공에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에 다시 건설된 성벽은 티글랏 빌레셋 III세(734-33 BCE)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바빌론(587-586 BCE) 침공 무렵에는 크게 파괴되었다.

⑦ 이스라엘 시대가 종결되고 난 이후로는 페르시야, 헬라, 로마, 비쟌틴, 그 이후 아랍시대로 이어진다.

4, 게셀 카렌다

일곱 행으로 적힌 고대 히브리어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다. 크기는 가로 7.2cm, 세로 11.1cm 로 아주 작은 것이고, 이것에 적혀있는 고대 히브리어의 글자체를 비교 연구한 결과 10 세기경의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2개월 단위로 묶은 농사 절기와 관련된 내용으로 판독되었다. 첫번째 두달은 열매를 수확하는 절기(????? ??)이며, 특별히 올리브 수확기(티쉬리-헤쉬반)이다. 그 다음 두 달 동안은 곡물 파종기(???;키슬레브-테베트), 다음 두 달은 후기 파종기(???;쉐바트-아다르), 그리고 다음 한 달은 아마(????;삼) 수확기(니산), 다음 한 달은 보리 수확기(???? ???;이야르), 밀 수확기(???;시반), 그 다음 두 달 동안은 포도 가지 치기(???? ?????;타무즈-아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름철(???)', 즉 무화과를 따서 말리는 시기(엘룰)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왼쪽 귀퉁이에는 '아비...???'라는 글자가 수직으로 적혀있는데 아마도 이 비석 조각의 소유자 이름으로 보인다.

이 비석 조각의 용도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서기관이 글자 연습을 위해서 사용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유는 글자체가 일정하지 않고 거칠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농부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이기 위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적혀있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 유행하던 민속 노래의 가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진품은 현재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5, 예루살렘에서 게셀을 가는 방법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 30분 정도가면 라투른 갈림길이 나온다. 라투른 갈림길에서 남쪽 르호봇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내려가다가 3Km 정도 더가면 기브츠 나흐숀(Na?shon)이 나온다. 나흐숀 기브츠은 독립전쟁 당시 예루살렘의 포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던 "나흐숀 작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1950년에 설립되어 약 400여명 가량이 살고 있는 작은 협동농장이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3Km 가면 모샤브 베코아(Beqoa)를 지난다. 베코아 모샤브는 역시 독립전쟁 당시에 예루살렘의 포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작전 수행을 위하여 만들어졌던 '부르마 도로(Burma Road)' 옆에 건설된 곳이다. 이곳은 원래 데이르 무헤이씬(Deir Mu?eisin)이라는 아랍 마을이 있었던 곳인데 독립전쟁 당시에 버려진 이 아랍 마을 위에 1951년에 베코아 모샤브가 건설되었고 대략 500여명 살고 있다.이 지역에는 라투른과 아얄론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으며 '무싸 에 탈리(Musa et-Tali')라고 불리우는 아랍 사람들의 성역과 아랍 마을의 잔해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약 1.5Km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서 다시 약 3Km 정도를 더 가면 카르메이 요셉(Karme Yosef)라는 정착촌이 나온다. 도로 왼쪽 편으로는 미쉬마르 다비드(Mishmar Dawid) 기브츠가 보인다. 카르메이 요셉 마을은 요셉 싸피르라는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으며 이 마을 옆쪽에서 게셀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는 오솔길이 연결된다. 비포장 길을 따라서 500여 미터 정도 올라가면 게셀 발굴 현장에 도착하게 된다.

6, 텔 게셀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카르메이 요셉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500여 미터 올라가서 로타리가 나온다. 로타리를 돌아서 서쪽방향으로 좌회전하면 마을 끝에 다다르면서 비포장 도로가 나타나는데, 오른쪽으로는 과수원을 끼고 외쪽으로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비포장 도로를 따라 약 1 km 정도 가면 게셀 발굴 현장에 도착한다. 텔 아래 쪽에 가시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그곳에다가 승용차를 세워두고 걸어 올라가면 된다. 약 200여 미터 걸어올라가면 엉성한 건물 기초들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발굴 당시에 발굴 캠프가 세워졌던 곳이다. 발굴 캠프 자리에서 100여 미터 오른쪽(동쪽; 예루살렘 방향)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봉분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발굴 IV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중기청동기 시대의 성문의 모습과 성벽, 그리고 후기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시설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올라와서 동쪽으로 계속 150여 미터 가면 중기청동기 시대의 신전 자리에 도착한다. 1908년 발굴 당시에 발견된 것으로써 10개 정도의 큰 것의 크기가 3m 이상되는 돌기둥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50여 미터 내려가면 발굴 III 지역에 이르는데, 그곳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성문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성문의 형태가 므깃도하솔에서 발견된 것들의 형태와 동일하게 생겼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외에도 동북쪽 끝까지 갔다가 북쪽 성벽 발굴 지역을 돌아보면서 원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

('나눔' 98. 9월 호 에서)

게셀의 신당(주전 1600년 Tel Aviv 인근, 높이 6-11피트)

이 공개된 석주 기념물들은 1902년에 Tel Gezer에서 아일랜드 고고학자 R.A.S. Macalister가 첫 번 발굴 작업하는 기간에 발굴되었다. 그 게셀은 성경에 여호수아 10장 33절, 삿 1장 29절, 열왕기상 9장 15-17절, 역대상 4장 16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높이가 약 5피트에서 11피트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그림과 같이 줄지어 있는 것으로 그 돌들은 북에서 남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1번에서 10번까지가 거의 55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 서쪽의 5번과 6번의 석주들은 큰 네모진 돌이 있었는데 돌 벽돌로 만들었다. 그 꼭대기에는 네모지게 파내어져 있었다. 큰 광장에 있는 이 돌들과 통은 낮은 돌담에 둘러 있었고 제한되어 있었다. 마카리스타는 그 설치물 밑에서 두 방처럼 만든 동굴을 발견했는데 어린 아이들의 유골들을 발견했다.

마카리스타는 그 산당이 주전 2500년경에 설치했는데 그 기둥들과 다른 모양들은 후대에 보강했으며 약 주전 14세기에 만든 것으로 감정해 냈다.마카리스타는 믿기를 아마 불완전하지만 공동묘지들도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다가 그 동굴에 넣었다가 공동묘지에 이장한 것으로 보았다. 신탁들은 그리스에 있는 델파이 신전에서처럼 동굴들에서 주어졌는데 제사장들이 가장 큰 기둥꼭대기를 잡았고 또 백성들은 그 돌들에 입맞추기 위하여 왔었다.

마카리스타의 결론은 대부분 의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산당인 게셀의 그 복합구조는 인정하고 있다. 1968년에 산당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발굴한 William Dever는 중기동기시대(주전 1600년) 말로 감정한 그 완전한 복합건물을 만들었다. 또 후기 동기시대에도 그것이 사용되었음을 밝혀냈다.그 돌들은 언약 또는 약속과도 관계가 있다. 그 증거는 창세기 31장 43-45절에 언급한 바에 의하면 언약의 증거로 돌들을 사용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언약을 맺은 증거로 돌기둥 하나를 세웠다. 또한 여호수아도 여호수아 24장 25-27절에서 자기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만 섬길 것을 약속하고 그 증거로 큰 돌을 세웠다.

그런데 그곳의 큰 통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은 유물들이다. 어떤 이들은 돌의 어떤 형상을 세우기 위한 받침으로나, 또는 나무 우상을 세운 받침이나 제사나 어떤 의식을 위한 물건으로 보았다.고대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연합되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늘 유적지를 발굴하는 가운데 얻은 지식이지만, 알 수 없는 종교적인 작용이 정치나 실생활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에 의하여 그 사회가 건전하기도 하고 부패 타락하기도 했는데 이 게셀은 그 사회와 그 정치를 부패 타락하게 했다.

(원용국 교수 / 안양대학교 성서고고학, 한국성서고고학 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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