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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31
 제목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
 주제어  [구원] [교육]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다리 예화

 

이 교육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교육의 목적이다. "왜 교육을 시켜야 하며 교육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정답을 가지고 교육에 임해야 한다. 그 답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요, 둘째는 신자의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목표 중에서 구원의 확신은 대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물론 이렇게 믿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성경적으로 터득하고 어떤 질문에도 성경적으로 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통하여 이단들이 건실한 성도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다음의 예화를 들려주고 먼저 정답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이 예화는 교육의 근본 방향이기도 하다. 이 예화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송인규 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884년 14쪽)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 낡고 허술한 외나무 다리가 있다. 두 명의 나그네가 그 다리 앞으로 다가와서 이 다리는 낡았지만 능히 건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 한 사람이 먼저 시도하였는데, 도중에 다리가 흔들리며 불안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무사히 건너간다. 다음 사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건너간다. 이상의 내용을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대답을 경청한다.  

 

당신은 이런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 두 사람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예화 자체가 기독교적인 예화가 아니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근거한 예화이기 때문이다.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다리 위로 건너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리 밑으로 가면서 자기를 합리화할 것이다. 도중에 하나님의 구조를 요청하는 것은 "하면 된다"는 신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 예화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에서 이 예화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두가지 유형의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한국 교회가 외곡된 길로 가는 단적인 예이다. 두가지 유형이란 첫째,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는 다리 위로 걸어가야 한다고 가르치며, 가면서 기도하고 위험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둘째, 지성적이며 이지적인 교회는 배를 타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유형이 바른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목회자들은 알아야 한다.

 

우선 이 예화를 순수한 가독교적인 것으로 수정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이 다리에는 충실한 청지기가 있어서 매일 이 다리의 안전을 점검한 후 다리 앞에 "이 다리는 낡기는 하였어도 오늘은 건너갈 수 있습니다."라는 팻말을 붙였다고 가정을 해 본다.

나그네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곳에 오면 다리를 보지 않고 팻말을 볼 것이다. 팻말을 쓴 사람의 인격을 믿을 수 있고, 그 글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다면 다리의 상태에 구애되지 않고 다리 위로 건너갈 것이다. 다리를 관리하는 진실한 정지기는 인생 길을 조망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팻말은 그의 말씀인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기에 구원의 확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의 실상은 구원의 확신은 자신들의 체험에 근거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은 나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최대의 은혜로 알고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때로는 성경 공부를 하는 교회도 있으나 성경을 배우는 목적이 성경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뿐이다. 이런 것도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신자는 구원의 확신부터 하나님의 말씀 곧 팻말에 근거하여야 한다.

 

2.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

 

성도들이 가지는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야 한다. 자기의 느낌이나 체험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객관성이 없는 것이다. 객관성이 있는 구원의 확신은 객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 외에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 가지 언약을 주셨다.

 

1) 구원의 언약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창세 전부터 시작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구원의 언약"을 맺고 이것을 근거로 인류 구원의 대장정을 진행하신다. 구원의 언약이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구원 언약을 맺은 시기는 창세 전이다.

인류의 구원은 결코 즉흥적인 것도,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수정된 것도 아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 결코 인간의 행동에 의해 흔들리거나 변경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구원사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애당초 창세전에 구원의 언약을 맺으셨다.

 

(2) 구원언약의 당사자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3) 구원언약의 내용은

첫째, 성부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계획하시며,

둘째, 성자 하나님은 성부가 계획한 것을 모두 성취하시며,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다.

셋째, 성령 하나님은 성부가 계획하고 성자가 이룬 것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수 있도곡 사역하는 것이다.

 

(4) 구원언약의 대상자는 예정과 선택을 받은 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역은 낭비와 실패가 없는 절대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이런 구원언약에 근거하여 현실에서 이룬 하나님의 섭리이니 감사할 뿐이다.

    성도들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은혜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2)행위언약

구원의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창 1:26)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1) 인간에게 있는 도덕적 형상과, (2) 외면적 형상인 육신과, (3) 권위적 형상인 영장권과, (4) 인격과 영혼에 나타나는 자연적 형상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형상론보다 도덕성과 이성(理性)으로 간단히 기억하는 것이 좋겠고, 이성은 본질적인 현상인 반면에 도덕성은 부대적(附帶的)인 형상으로써 인류 타락으로 도덕성이 상실되어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행위언약이며, 성경적 근거는 창 2:17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이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으면 죽고 안먹으면 산다]는 뜻이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행위에 의한 구원에 실패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다. 그 후 저들은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창 3:7)를 만들어 몸을 가린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몸을 두른 것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가릴 수 없으며, 자신의 선행으로는 죄를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한다.

이 시점에서 간단하게 언급을 해야할 것은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미치는 문제이다. 이때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1)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자연적관계)이며, (2) 언약 관계로 하나님과 행위언약을 맺은 관계이며, (3) 대표적 관계로 그는 모든 인류, 즉 그의 후손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죄는 지금까지 온 인류에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3) 은혜언약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자연히 은혜로 구원해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언약을 주시는데, 은혜언약의 근거는 창 3:15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은혜언약은 예수의 사역을 통한 구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 3:15의 말씀은 메시아 초림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면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강림하신다. 그래서 "내가(하나님) 너로(뱀) 여자와(하와) 원수가 되게 하고"라고 하신다. 창 3:15 말씀의 열쇠는 [여자의 후손]이다. 여자의 후손이란 단수이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많은 자녀들이 생산되었고, 그의 후손이 전 인류이기 때문에 "여인의 후손"이란 당연히 복수를 사용해야 옳은 것이다. 그러나 단수로 사용한 것는 깊은 뜻이 있다.

이 "여인의 후손"은 앞으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의 몸(동정녀)을 통하여 오시는 메시아, 바로 그 한 분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 여인의 후손을 대적하여 마귀의 세력은 "발꿈치를 상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을 박겠지만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죽음과 죄와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머리를 상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메시아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써 예수는 부활로써 죄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창 3:15의 말씀은 예수의 오심과 십자가, 부활 등의 예언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며 은혜언약이다.

 

4) 가죽 옷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천을 통하여 구원을 실감있게 보여 주셨는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창 3:21).

우선 가죽옷을 입으면 부끄러운 몸을 가릴 수 있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영적으로 가죽옷은 죄의 몸을 가려주는 옷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옷을 상징한다.

가죽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이 죽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가죽 옷을 지으신 분은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은 그 가죽 옷을 입혀 주시기까지 하신다. 이 사실은 구원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을 통하여 예수의 구속사역을 믿게하는 것을 입혀 주시는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면 아담은 무엇을 했는가? 다만 아멘으로 받아 입은 것 뿐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가 이루시고, 성령이 적용해 주실 때 사람은 [아멘, 감사합니다]라고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수용이 바로 영접이며 믿음이다(요 1:12).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이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5) 가인과 아벨

아담 부부는 가죽옷을 얻어 입고 에덴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자녀를 생산하는데, 그들의 후손은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창 5:4)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담 부부는 가인과 아벨 이전에도, 이후에도 많은 자녀를 낳았다(창 4:14, 5:4). 그러나 많은 자손들을 다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성경은 인류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구속에 필요한 가인과 아벨의 사건만을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왜일까? 보통 아벨이 "첫 새끼를 드린"(창 4:4) 것을 인간의 [정성]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가인은 첫 열매가 아니고 먹고 남은 것을 드렸을까? 당시 농기구도 없는 시절에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목축보다 더 힘든 직업이었을 것이며, 추수한 곡식을 제물이 되도록 가루를 만드는 과정도 아벨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보다 아벨의 제물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하였다(히 11:4).

 

아벨은 무엇을 믿었을까?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은 자녀들에게 에덴동산의 사건, 곧 선악과와 무화과 나무 잎의 치마, 그리고 여인의 후손과 가죽옷으로 이어지는 죄와 구속의 복음을 말해 주었을 것이다. 아벨은 이 사실을 믿었으나 가인은 믿지 아니했다. 이들 형제는 모두 한 하나님을 섬겼고 그 분에게 제사(예배)를 드렸다. 가인은 자기 주관에 따라 드렸고 아벨은 은혜 언약과 가죽 옷을 믿는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 결국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구원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가진 예배와, 섬김을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이다.

 

 

>> 목차고리 : 새 신자 교육의 이론과 실제

>> 연결고리 : 교육, 성령,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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