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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8
 제목  총회 해산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출현(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주제어  [장로교] [한국 교회사] [일제 탄압]
 자료출처  예장통합총회  성경본문  
 내용

총회 해산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출현

 

 

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자 친일 세력들은 서울에 조선신학원을 설립하자고 총회에서 결의를 하자 교세가 강한 이북 세들은 그냥 있을 수 없다 하여 채필근 목사를 중심해서 1940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에 편입학했던 신학생들은 이미 장로회신학교에 다니다가 편입한 학생들도 있었다. 교장은 채필근 목사가 선입됐다. 한편 서울에서 설립하려고 했던 조선신학원은 경기도 학무국으로부터 사설학원 인가를 얻어 그해 4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교를 하였다. 이 학원의 이사장겸 원장은 김대현 장로가 맡았으며 교수는 김재준 윤인구 목사 등이었다.
 

1940년 평양신학교가 개교되자 남한 출신들은 조선신학원에 진학하였으며 북한 출신들은 평양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한편 1941년 제 30회 총회가 개회되자 국민의식이라 하여 동방요배 황국신민서가 기미가요(일본국가) 신사참배 등을 실시하고 총회를 개회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은 지방교회에서도 실시하였다. 안건 중 소위 애국기 헌납이라 하여 교인 1인당 1천 원씩 헌금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국민정신총동원총회연맹을 총회를 비롯해서 각 노회ㅣ 개교회까지 조직케하여 애국반을 운영하면서 침략전에 사용할 쇠붙이를 모집하였으며 심지어 교회종까지 헌납토록 하였다.
 
여기에 교회 성직자는 물론 일반교인들에게까지 창씨 개명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중심했던 활동은 조선군 사령부 환자용 자동차 3대와 전투기 1대를 헌납하는 등 일본 대동아공영권에 절대적으로 협력을 하였다. 1942년 10월 제31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회됐다.

이어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때마침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조선인 징용 지원병 여자근로정신대를 강제로 징용해 갔으며 징용병은 탄광으로 군사노동자 지원병은 총알받이로 전선으로 나갔으며 여성근로정신대는 일본군 성노리게 깜으로 끌고 갔다. 일본은 1942년부터는 각 교단을 해산하려고 준비 중에 있었으며 1943년 5월7일 일제의 강압 의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산되고 동시에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 출범하였다. 따라서 각 노회는 각 교루고 명칭을 바꾸었으며 초대 통리에 채필근 목사가 선출됐다.

 

이후 한국교회 목사들은 일본 성지순례라하여 각 교단별로 일본 동경에 있는 활거를 비롯해서 야스쿠니 신사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해이안 신궁 등을 참배하고 돌아 온 일이 계속적으로 진행됐다. drjt도 잠시뿐이었다. 태평양젅ㅇ을 일으켰던 일제는 폐전이 짙어지면서 1944년 봄부터 각 지역의 교회를 하나로 통폐합하고 수요일밤과 주일밤 예배를 금지시켰다. 다시 1945년 7월 한국에 있는 모든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초대 통리에 김관식 목사를 총무에 송창근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때 각 교단 대표들이 정동감기료괴에 모여 투표는 하였지만 개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개표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 목차고리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 연결고리 : 장로교장로 교회사, 한국 교회사, 일제 탄압, 삼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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