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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3-26
 제목  김석창(1876. ?~1950.10. ?)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대한민국]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876년 평북 철산에서 출생했으며,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선천남교회를 설립, 시무하면서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선천경찰서 폭파사건으로 8년의 옥고를 치뤘으며, 6·25 당시 1950년 10월 공산군에게 살해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정보는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 하였다.

 

사서 삼경까지 읽고 훈장을 함
1906년 신성학교 창립 주역
1911년 평양신학교 졸업(4회)
신천읍교회 담임. 신천남교회 개척
1912년 조선예수교총회 설립 부회계 독노회 회계역임

 

1874년 평북철산군 여한면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사서삼경까지 읽었고 서당의 훈장일을 하다가 그의 나이28세때 선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선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선교사 휘트모어(Whittemoue, Norman C 魏大模)를 만난 것을 인연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강인한 소유자인 그는 예수믿기가 무섭게 열정적이어서 곧장 교회의 조사로 발탁되어 훌륭한 전도인 역할을 했다. 1906년에 중등교육기관인 신성학교를 창립하는데 양전백,소정관 등과 함께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석창은 이 학교에서 윤리, 한문 등을 가르쳤고 그 스스로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제4회로 졸업하였다. 김석창이 목사가 되면서 선천읍교회는 일대 변혁을 맞았다. 교회도 현대식 건물로 건축되었고 교인도 1천명이 넘어 새로운 지교회 설립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교회는 김목사가 목사로 안수받은 것을 기화로 선천 남교회와 분리되었다. 본래의 교회는 선천 북교회로 존속하고 김목사가 개척하는 교회는 남교회로 하여 개척이 시작되었다. 이내 남교회의 교세도 북교회를 능가하게 되었다. 1912년 조선예수교총회가 설립되면서 김목사는 부회계를 역임했고 독노회시는 회계도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을 기해 또 한차례의 옥고를 치르고 선천에서의 3.1독립만세 사건때 신성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만세를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8월 24일 선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터져 투척자 박치의를 조정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교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고문후유증으로 바른편 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출옥 후 3차례나 평북노회장을 역임했고 1926년에 제15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자주정신을 일깨운다는 이유로 강도권을 맞길 수 없다는 이유로 강단에 설교를 금했고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해방후 비로소 강단에 섰다 오직 그의 설교는 예수뿐이었다. 일제하에 반골 원로를 공산주의로 회유할 수 없음을 알고 술먹은 군관을 시켜 교인들 보는 앞에서 짓밟기도 했다. 1949년 1월 김목사는 가족들을 월남시키고 혼자 교회를 지키고 있다가 1950년 10월 공산군에 체포당해 총살되어 순교했다. 1963년 대한민국정부는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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