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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6-21
 제목  아펜젤러 목사의 헌신적 삶
 주제어키워드  기획(아펜젤러의 자취찾기:포커스)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4403  추천수  9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의 서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부친 기드온과 독일계 매노나이트파 신자인 모친 마리아의 둘째 아들로, 어린 시절은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그의 조상은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스위스의 칸톤스(cantons)에 있는 계곡 appenzell에서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어려서는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랐다. 14살에 세례를 자원하여 받았으며, 웨스트체스터 고등(사범)학교 시절(18세, 1876년 10월 6일) 한 특별집회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은총과 감격을 느끼게 되어 선교를 위한 헌신을 다졌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기도회를 조직했는데 나중에 이는 웨스터체스터의 기독교청년회(YMCA)가 되었다. 20세 되던 1878년 가을 필라델피아 서부의 Lancaster에 있는 프랭클린 앤 마샬대학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으며,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져 어학에 능통하였다. 그는 Lancaster 제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리회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드류대학의 신학교(Drew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에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그해 성탄주간에 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885년 1월에 Drew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2월 2일에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은 후, 다음날 아라빅호에 몸을 싣고 태평양을 건넌다.



대한민국 순회선교



갑신정변 이후 국내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일본에 잠시 머물던 아펜젤러 부부는 3개월 뒤에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언더우드, 스크랜톤 선교사 등과 함께 기도회를 하고 세례를 베푸는 한편 학원선교에 힘쓰며 한국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1887년 4월 13일, 아펜젤러는 한국의 서북지방 평양까지 조랑말을 타고 선교지 답사 여행을 떠난다. 제물포 세관에 근무하던 헌트(J. H. Hunt)와 동행하여 떠난 이 첫번째 여정은 서울을 출발하여 고양, 장단, 옛 도읍지 송도, 김천, 통천, 평산, 서흥, 황주를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으며 5월 12일 다시 서울로 돌아온 한달간의 여정이었다.

다음해 4월에는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두번째 평양방문을 한다. 그러나 이때는 선교사에 대한 유언비어로 인해 선교금지 조치가 내려져서 한국정부의 시책에 협조하기 위해 즉각 귀경하게 된다.

금지령이 풀린 그해 10월에는 스크랜톤 의사와 같이 의주를 순회하면서 초가집 한채를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케 함으로써 감리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한명의 세례인과 14명의 학습인으로 구성된 교회였다.

이듬해인 1889년 8월에는 존스(G. H. Jones)선교사를 동반하여 말을 타고 충청도의 공주와 강원도의 원주를 거쳐 경상도의 대구와 부산까지 16일에 걸쳐 순회전도를 하였다. 신자 한 사람도 없이 둘이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상황속에서도 8개도 가운데 6개도를 선교차 방문 여행 하였고, 1888년 한해동안 약 7,200리(1,800Mile)의 미개척지를 순회전도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다양한 활동과 업적



아펜젤러는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시작, 고종으로부터 그 이름을 하사받은 배재학당을 비롯하여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 선교에 열중하였다. 당시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담하여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고,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뿐만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門)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 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 』(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 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톤,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활동 및 교육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44세의 안타까운 최후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이던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키 위해 인천에서 배로 출발했다. 오사가 선박회사가 운영하는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그날 밤 10시쯤에 어청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짙은 안개로 지척이 구분되지 않아 같은 회사의 키소가와 마루와 충돌하여 파선, 침몰했다. 당시 생존자 보울비의 설명에 따르면, 배가 충돌하자 그 충격으로 보울비 자신은 바닥에 쓰러졌고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방 맞은편 선실에서 독서를 하던 아펜젤러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치면서 계단을 향해 앞서 나가고 있었다. 2분도 채 되기 전에 갑판 앞부분의 반이 물에 잠겼고 선미는 물 밖으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배는 계속 가라앉고 아펜젤러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와 동행했던 그의 조수이며 비서인 조한규(조성규)씨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목포 집으로 가는 한 어린 여학생을 구하려는 듯 했다. 배는 거의 45도로 기울며 가라앉았고 다음 순간 보일러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뒤집어진 구명정을 붙들고 45분동안 물위를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결국 아펜젤러 목사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영원히 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사고로 아펜젤러를 비롯한 일본인 승객 4명, 한국인 승객 14명, 선원 8명이 사망하였다. 선교를 위해 삶을 바친 아펜젤러 목사는 주님의 말씀대로 목숨까지도 타인을 위해 바치는 큰 사랑을 이루고 떠난 것이다.





아펜젤러의 활동 연혁





1885. 2. 2 - 목사 안수

1885. 4. 5 - 제물포 도착

1885. 7. 29 - 상경

1887. 3. 14 - 배재학당 현판식

1887. 4. 13 - 1차 평양선교답사 여행

1887. 7. 24 - 첫세례(박중상)

1887. 8. 5 - 배재학당건물 정초식

1887. 10. 9 - 정동제일교회 창립

1887. 10. 16 - 최초의 여성 세례(29세, 최씨부인)

1887. 12. 7 - 최초의 학생기도회

1887. 12. 25 - 첫한국어 설교

1888. 1 - 배재제본소(삼문출판사) 설립

1888. 4 - 두번째 평양방문

1888. 10 - 의주 순회

1889. 5 - 『교회』 발간

1889. 8 - 충청도·경상도 탐방

1890. 1 - 종로서점 설치

1890. 6. 25 - 대한성교서회 회장 피선

1892. 1 -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 발간

1892 - 안식년

1893 - 한국 도착

1895. 9. 9 - 정동제일교회 정초식

1897. 2. 6 -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창간

1900. 9. 9 - 신약전서 출판 기념예배

1900. 9. 28 - 2차 안식년

1901. 9. 15 - 한국 도착

1902. 5 - 남한지역 총리사로 임명

1902. 6. 11 - 선박충돌사고로 사망(군산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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