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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10-30
 제목  <기획시리즈> 한반도 선교의 새역사를 위하여(남해편)
 주제어키워드  김학진 목사글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058  추천수  3
<오징어 타령> - 소안도 민요 中 -

오징어야 오징어야 압록강 뒷쪽 강 오징어야/ 닻줄이 없어서 배를 못타냐/ 먹통이 없어서 글을 못쓰냐/ 오징어 대장이 죽었으니/ 넉목갈이가 그 누구냐/ 가자미 보고 가라고 해도/ 기미걸 못한께 못간다고/ 갈치보고 가자고 해도/ 장에 대든다고 못간다고/ 도미보고 가자고 해도/ 짓상에 오른다고 못간다고 하고/ 우럭보고 가자고 해도/ 울음운다고 못간다고/ 짱애보고 가자고 항께/ 만사떤다고 못간다고/ 전대미 보고 가자고 항께/ 목욕 간다고 못간다고/ 문어보고 가자고 항께/ 뽈애분다고 못간다고/ 굼벵이 보고 가자고 항께/ 궁근다고 못간다고/ 조문갈이가 전이나 없으니 이내 혼자 가고 간다



변화 속의 호남인들



전남 완도 소안도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이다. 대개 강진, 장흥, 해남, 영광, 나주 등지에서 살던 이들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로 이 섬에 온 이들이다.

소안도 사람들의 성향을 기록해 놓는 고문서에서의 소안도가 양정 공사전의 도피 소굴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들의 신분이 몰락 양반들이거나 신분이 낮은 아랫사람들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소안도 사람들은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사는 정기순(여, 64세)은 “노래를 안부르고는 못산다. 여자들이 밭 매러 가면 뭔 노래를 부르던지 노래를 부른다. 신세 타령도 하고, 밭 매면서 보리 매면서, 나무하면서도 노래한다. 우리같은 사람은 어디가도 노래를 부르고 앉아서도 노래부르고 맨날 노래부른다. 노래 안 부르면 못산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생활 속에서 노래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말로는 할 수 없는 내용도 노래로는 쉽게 표현한다. 소안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품앗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소안도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들은 <밭-논-바다>로 꾸준히 생업의 바탕을 확대해 나갔다. 밭농사가 처음부터 생업의 중심이었는데 바다로 이동해 가면서도 그 기능을 잃지 않았다. 밭농사에서의 노동력 동원 방식은 <품앗이>였다.

품앗이를 통해 노동력 동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품앗이>는 인적 교류가 이루어져 정보가 교환되는 생활 공동체의 기초 단위였고 기초 문화를 형성한 단위였다. 또 동족 마을의 경우, 같은 성씨끼리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형제간, 또는 사촌들끼리 품앗이를 하는 등 가까운 일가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 <품앗이> 조직이 전통 민요를 연행하고 전승하는 기본 조직이 되었다.

이런 조직의 특성 때문에 품앗이 조직이 공고하여 쉽게 해체되지는 않았지만 민요를 생산하고 연행하는 차원에서는 크게 활발하지 못했다.

소안도 전통 민요에는 여성들의 밭매기 노래가 많다. 이는 여성들의 노동량이 많았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신명표출에 능했단 것을 의미한다.

남성들이 불렀던 노래는 여성들의 노래와는 다른 면을 지녔다. 뱃노래 중에서도 가장 기본을 이루는 놋소리로는 노동의 힘을 단순히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노젓기가 그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멸치잡이에서 부른 뱃노래는 상업성이 깔려있다.

마을 공동체의 신명은 장례에서 연행된 철야에서 실현되었다. 밭매기 노래에서는 여성들의 신명이 담겼다고 하지만 마을 공동체의 전체로 확산되는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작자 미상의 어느 선교사가 적어 놓은 기록을 보자.



한국인들은 본래 시를 즐기는 사람들이요 매우 영적인 백성이다. 그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현인들의 현명한 말씀을 좋아한다. 가난한 농가에서도 전통적인 휘호들이 벽과 문쪽에 걸려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비율의 국민이 자기나라 글을 읽고 쓸 줄 알뿐 아니라 중국글도 마찬가지로 안다.

유교는 중국에서 일어났지만 그 유교의 개념을 실천하는 데에서는 한국인들이 중국인보다 더 중국적이다. 유교의 진리들은 권위확립을 위해 존경받고 있는데 유교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해야 한다. 지적인 한국인들에게 이것은 그가 옛것을 개선함으로써 그것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감히 새것을 발명했던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오히려 중국은 서서히 개화되어 가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은 이 지배적인 종교적 생각에 사로잡혀 현 세기까지 정체되고 있었다. 한국에 갔을 때 모든 한국인들이 입는 똑같은 스타일의 의상과 상투를 중국의 옛 사원에서도 한 것도 옛날의 중국과 한국의 관습이 같았으리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나라가 조용히 있다는 것이 반드시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진보의 힘은 거역할 수 없다. 한국이 3천년 동안이나 변화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은 스스로 공언한 강한 종교적 신념과 그 신념을 실현하는 능력때문이었다.



1907년의 통계를 보면 목포교회는 세례교인 105명과 신도수 400명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4년 전의 통계에 무려 4배에 해당된다. 목포교회에 특기할 만한 것은 도시의 부유층 인사들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일이다. 교회는 민중의 전체 계층을 전도하게 되었다.

목포 주위에 있는 농어촌선교 역시 놀랄만했다. 1903년에는 1개군에 2개의 예배처소밖에 없었는데 1907년에는 4개군에 13개의 예배처소로 증가되었다. 목포지역의 교회가 이러한 성장을 거듭하자 선교회에서도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목포스테이션 재개의 전략적 중요성을 본 후 선교부에 간곡히 설명, 그 수락을 청원하였다.

그 후 선교회에서는 목포스테이션을 다시 열기로 결정하고 변요한 목사와 새로이 도착한 로라복, 그릴 맹현리 목사를 그곳에 배치했다. 의료선교사로는 이전에 전주에서 피습을 당하여 귀국했던 보의사가 완치되어 돌아와 목포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미 불붙기 시작한 목포지역 교회의 성장은 이들의 재배치로 더욱 활기를 띄었다. 불과 2년 후인 1909년 목포교회의 세례교인수는 105명에서 170명으로, 전체 신도수는 400명에서 550명으로 증가하였고, 목포스테이션에 전체를 보면 예배처소 40처, 세례교인 275명, 원입교인 550명, 출석하는 신자의 총수는 1400명을 기록했다. 같은 해 목포교회는 윤식명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완전한 교회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개교회로서 한국인 목회자를 모시어 자립교회가 된 곳으로는 전 호남지역에서 목포교회가 처음이었고, 한국에서는 네번째였다.

목포스테이션에서 관심을 끈 것은 맹현리 선교사가 시작한 도시선교였다. 이들 부부는 수년간 이 선교사업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투신하였는데 이들의 개척자적 선교정신은 높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가 선교한 지역은 목포 군도로서 남서쪽으로 160km , 북동쪽으로 240 km가 되는 넓은 지역 내에 있는 섬들인데 10만평 이상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비록 그가 소형선박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많은 섬들을 순행해야만 했던 그로서 해상 교통상의 어려움은 실로 지대했을 것이다. 게다가 섬주민들은 대체로 극히 미신적이고 낙후된 사람들이어서 이들에게 접근하기란 용이한 일이 못되었다. 1910년, 그는 보고서를 통해 95개 섬에 있는 500여 개의 마을에서 복음을 증거한 끝에 교회 3개, 예배처소 25처를 설립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맹현리 목사의 선교활동은 그의 부인의 협조 없이는 어려웠을 만큼 그 공헌이 컸다. 그녀는 잘 훈련된 간호원이었고, 남편이 가는 곳마다 동행하여 치료소를 건립하고 주민들을 치료해 줌으로써 그들에게 선교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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