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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1-03-28
 제목  <선교광장> 삶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자
 주제어키워드  삶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자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025  추천수  7
선교광장



삶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자

갈라디아서 4장 18,19절



김준곤목사(한국CCC총재)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아들의 형상을 본 받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형상을 육체로 성육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형상이 또한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고, 그 예수님 닮기를 우리 신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예수 같은 사람, 예수의 빛과 향기를 발하고, 어딘지 모르게 예수의 마음과 분위기를 접하며 느낄 수 있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이고, 편지이며, 그의 가지이고, 작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록에서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람의 얼굴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은 참 육체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굶주리시고 시험과 고통을 받으시고, 슬퍼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그래서 그는 참사람 중의 사람이요, 인간 중의 표준 인간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심판대에서 가면을 벗기는 날에 진짜 자기를 알 수 있습니다. 착하게 보이고, 의롭게 보이고, 경건하게 보이고, 고독하게 보이고, 예민하게 보이기 위해서 연극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가면을 근본적으로 다 벗어버릴 수는 없지만, 날마다 기도하면서 정직해지고, 투명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잘 산다는 것과, 심은 대로 거두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자연법이고, 크리스천의 법이기도 합니다.

성숙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듯 성장 법칙에는 단계적인 발전이 요구됩니다. 정직해지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에게나 크리스천에게나 다 마찬가지로 요구됩니다. 기독교는 정직하지 않아도 되고 기독교는 도덕을 초월한다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훨씬 더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그래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다 예수의 얼굴에 나타나 있을 것이고 특별히 사랑과 도덕성과 의와 거룩, 온유, 겸손 이 모든 것을 얼굴에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닮은 것같이, 부부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같은 생각을 하고 그래서 같은 얼굴을 하고 서로 닮은 것같이 우리가 평생 주님을 사모하고 닮고 싶고 존경하고 기도하면 그 주님의 얼굴을 더 많이 닮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성이 바뀌었고 국적도 바꿔졌고 우리의 마음도 얼굴도 바꿔졌습니다. 전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할 때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났고 또한 순교하는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고 정말 예수님과 같이 빛이 났습니다 (행 6:15;7:55∼60).

그런데 우리들은 물론 항상 조심하려 하겠지만 은연 중에 나오는 가시돋힌 말, 서릿발 같은 말,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처가 치료받고, 절망 속에서 소망을, 미움 속에서 사랑을 갖게 되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언어와 생각 속에서 예수를 닮은 주님 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형상을 닮은 생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침묵하는 모습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고 한 것처럼 웬지 모르게 묵묵하게 수난 당하고 남의 죄와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의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깊은 침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데려왔을 때 헤롯왕이 흥미거리로 삼기 위해 기적을 행하라 하였지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셨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세워 두고 돌을 들어 치려 하고 아우성치며 떠드는 군중 앞에서 침묵하신 예수님의 이런 광경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말씀을 하게 되면 천둥 같은 언어, 하늘 같고 깊은 바다와 높은 산과도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지상의 모든 언어들을 침묵시켜버리는 침묵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하는 모습을 닮아야 할텐데 예수 믿은 사람들의 다언증, 생명과 거리가 멀고 진리와 진실과도 무관한 지나친 다언증 현상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침묵하는 것처럼 창조주의 침묵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도 일체 침묵하셨습니다. 6백만의 유대인이 히틀러의 나치당에 의해 가스실에서 고통당하며 독살되어 갈 때 ‘신이여 그때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남미의 지진으로 2만 명의 생명들이 죽어 갈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몇 십만 명이 불타 죽고,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에,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행했던 고문과 혹사의 그 잔인한 시기에,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아들을 부둥켜 안고 절규할 때에, ‘신이여 그때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신의 존재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냉소하며 하나님을 고발할 때에도 그는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내보이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과 공의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는 그의 진실이었습니다. 사실 생명과 진실이란 것은 그리 많은 언어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침묵의 표정을 닮은 한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수난자의 얼굴

예수님의 평생 삶의 자세는 십자가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가고 있는 표정입니다. 깊은 사랑과 인간 죄의 아픔과 죽음의 상처를 항상 지니고 사는 분이십니다. 어느 일본 야쿠자 단원이었던 사람 한 명이 예수 믿고 새 생활을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야쿠자 단원들이 그를 잡으러 왔습니다. 이곳이 “아무개 집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죽고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새로 태어난 예수 믿은 사람이오.”라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고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고 수난자들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삶의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여기저기 돌아보지 않고 분명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돌아오지 않고 분명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다시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기 위해서 종이 되는 수난자의 상을 가지고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성공해서 출세하고, 남을 정복하고, 이기고만 사는 표정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크리스천의 모습 속에는 수난자의 표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닮아 갈 수 있습니까?

성령 충만,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또 생활로 본받는 성경 생활이 인격을 성화시킵니다. 생활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의 봉사활동을 연습해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려는 사모함을 갖고 기도하면 점점 예수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나 예수님이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인간들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자들은 양자 된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근본이 다르다는 말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은 그 이름이 「예수」이다. 이「예수」라는 말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자라나신 곳이 나사렛이기에 흔히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그리스도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6-7). 사람이 되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성품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성품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예수님의 영원성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사람은 시간의 제한을 받으며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즉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고, 태어나서 잠시 살아가지만 또 죽어 없어지는 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그리스도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에"라고 미가서에 예언되어 있다(미 5:2).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계셨는데 영원 전, 즉 시간이 있기도 전부터 계시던 분이다. 즉 예수님은 안 계셨던 때가 없으신 분으로 언제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하셨다. 모든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예수님의 족보에도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록되어 있으나(마 1:1) 사실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을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시는 분이다.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요 1:15)고 말하며 예수님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다.



언제나 계시지 않은 때가 없으신 분 즉 영원하신 예수님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신다.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다(히 1:11-12).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끝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어디나 계시는 편재성(偏在性)이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 사람은 장소의 제한을 받는다. 어느 한 곳에 있으면 다른 장소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집에 있으며 동시에 직장에 나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집에 있으며 동시에 직장에 나가 있을 수 없기에 출근해야 하고 또 퇴근해야 한다. 아주 바쁠 때는 몸을 나누어 동시에 여러 일을 해내고 싶을 때가 있으나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 데가 없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세상에 사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아는 학생에게 사탕 하나를 주겠어요"라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이야기하자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즉시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을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사탕 두 개를 주겠습니다." 이 어린 학생은 예수님이 어디나 계시기에 계시지 않는 곳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승천하시며 하신 말씀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생을 선교사로 지낸 리빙스턴에게 위로와 힘을 공급하였다. 그가 선교사역 중 일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비결을 물었다. 리빙스턴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따라 나를 보호해 주셨고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거기에 늘 함께 계시는 분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중 제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지만 신자들이 있는 곳에 늘 함께 계셔서 보호하시며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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