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년(중종 5) 3포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의 폭동사건으로 경오(庚午)의 난이라고도 한다. 3포(부산포·내이포·염포)를 개항한 이래 일본인들의 무역·거류가 허가되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났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왜관을 두어 그들의 교역·접대 장소로 하는 한편, 여러 차례 그들의 귀환을 요구하고 통제에 부심하였다.
1443년(세종 25) 계해조약 체결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부산포에 약 350명, 내이포에 약 1,500명, 염포에 약 120명 등 약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교만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간에 자주 충돌하였다.
또한 이들 항거왜인들은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거나 거주지역 내의 토지를 경작하여 생활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점차 왜리(倭里)라는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이탈하여 불법적으로 거주지역과 경작토지를 확대시켰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는 1429년(세종 11)부터 그들의 토지경작에 대한 수세론(收稅論)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대마도정벌 이후 상선이나 왜인들이 오지 않다가 최근에 비로소 교역하고 있으니 꼭 세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 수세책은 채택되지 않았다. 1494년(성종 25)에 이르러 거류왜인의 경전(耕田)에 대해서 수세하기로 했으나 회유책의 일환으로 또다시 면세의 혜택을 베풀었다. 삼포에 거류하는 왜인들은 조선정부로부터는 특혜를 받아 면세되었지만,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세종 때부터 거류인의 인구수에 따라 많은 면포를 받아갔다(大戶 2필, 小戶 1필). 그리고 공물을 수취하면서 삼포의 거류왜인을 총괄하는 조직체도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조직체는 기동성을 갖고 있어 뒤에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제정(諸政)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1510년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사다모리[宗貞盛]에게 통고하여 그들의 철거를 요구하고, 또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하자 그들의 불평이 늘어갔다. 그러자 3포의 일본인들은 쓰시마 일본인의 원조를 얻어 4,000∼5,000명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즉 제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오바리시〔大趙馬道〕와 야스고〔奴古守長〕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종성홍(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명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과 제포를 공격하는 왜란을 일으켰다. 이 때 부산 첨사 이우중을 살해하고 한때 내이포·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 방비를 격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즉각 대응하였다.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를 반격하여, 대파하고 곧 3포의 일본인 거류민도 추방하였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일본측은 배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그리고 참수된 왜인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뒷날 입국하는 왜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다. 조선과 일본간의 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는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왔다. 이에 따라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 내이포(=제포)만을 개항(開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