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3대 왕 명종대의 실록으로 활자본에 34권 21책으로 조선 선조 4년(1571)에 기록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재위 22년간의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 춘추관(春秋館) 감사(監事)였던 홍섬(洪暹)의 주재 아래 1571년(선조 4)에 완성, 간행했다. 원래의 표제는 《명종대왕실록(明宗大王實錄)》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의 내용
명종(明宗: 1534~1567)의 이름은 환(峘), 자(字)는 대양(對陽)이며, 중종(中宗)과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종은 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尹元衡) 일파[小尹]와 장경 왕후의 아우인 윤임(尹任) 일파[大尹]는 중종 때부터 갈등을 별였는데,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대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명종 2년에는 “《여주(女主)가 집권하고 간신 이기(李芑)가 정권을 농단한다.”는 익명서가 양재역(良才驛)에 붙은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에는 윤임의 사위 이홍윤(李洪胤) 형제의 역모 사건인 충주옥사(忠州獄事) 등이 연이어 일어나 1백여 명의 사류(士類)가 참화를 당하였다.
명종 초 9년 동안에 걸친 왕후의 섭정 하에 윤원형 일파의 외척정치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뇌물•청탁(請託)으로 관직을 구하는 풍조가 생기고, 수한(水旱)의 재난이 계속되는 속에 수령(守令)•변장(邊將)들의 탐학이 상습화되었다. 문정왕후가 장악하고 있었던 내수사에서는 불사(佛寺)를 숭상하여 승도가 날로 늘어나고 유불(儒佛) 사이의 알력을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후궁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의 수리와 원각사(圓覺寺) 수리에 신료들이 반발하고, 유생의 상사(上寺)•주업(做業)의 금지 등으로 성균관 유생들의 배불(排佛) 운동이 촉발되었다.
명종 5년 12월에는 선교 양종 복립(禪敎兩宗復立)의 명령이 문정 왕후로부터 내려져서, 사사(寺社)가 당초 99개 사(寺)이던 것이 명종 6년에는 2백 96개 사가 늘어나 모두 3백 95개 사가 되고, 명종 8년 1월 당시에 양종 시경승(兩宗試經僧) 원수(元數) 2천 6백인 중에 도첩(度牒)을 성급(成給)한 승의 수가 2천 5백 80명에 이르고, 내원당의 수도 거의 4백에 이르렀다. 명종 6년 6월에 승 보우(普雨)는 판선종사(判禪宗事), 도대선사(都大禪師)로서 봉은사 주지(奉恩寺住持)가 되고, 승 수진(守眞)은 판교종사(判敎宗事), 도대사(都大師)로서 봉선사 주지가 되었었다.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장살(杖殺)당하고, 윤형원도 전리(田里)로 퇴거(退居)하였다가 강릉(江陵)에서 죽었다. 오랜 파란 끝에 명종 21년 4월 양종(兩宗)•선과(禪科)는 드디어 혁파되고 말았다.
명종 7년 5월의 제주왜변(濟州倭變), 명종 8년 7월의 흑산도(黑山島) 등지의 왜변이 일어났다. 명종 8년 12월에는 북계(北界)의 초곳호인(草串胡人)을 엄습함으로써 호인의 조산(造山) 침공을 초래하여 교전한 일이 있었고, 명종 9년 2월에는 흑산도)에서의 왜적수토(倭賊搜討)•제주에서의 왜적 포살(捕殺) 등의 사건을 일으켜서 남왜 북로의 우환이 중첩되게 되었다.
명종 20년 4월에 문정 왕후가 죽고 윤원형 일당이 숙청되자, 비로소 사림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간을 중심으로 시폐 광구책(時弊匡救策)이 제기되면서 인재 탁용의 바람이 일어나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인사를 발탁하게 이르렀다. 조식(曺植)•이항(李恒)•성운(成運)•남언경(南彦經)•한수(韓脩)•김범(金範) 6인이 거론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 후로 이들 사림들을 기용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명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치세는 끝나고 말았다.
명종의 시호(諡號)는 공헌(恭憲), 존호는 헌의소문광숙경효(獻毅昭文光肅敬孝), 묘호는 명종(明宗)이며, 능호는 강릉(康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