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훈은 1905년 황해도 송화군 율리면 세진리에서 조호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은율군 누리 교회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국전쟁 때 교회를 떠나지 아니했으며, 1950년 10월 15일 공산당에게 총살되었다.
고등성경학교 졸업 1948년 평양신학교 졸업(44회) 태탄교회, 용현교회, 두현교회, 누리교회
어린시절부터 서당에나가 한문을 읽고 먼저 예수를 믿은 어머니를 따라 윤리교회 나가면서 예수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학풍에 젖었던 부친은 "사내 녀석이 믿을 종교가 없어서 야소교에 미치느냐"고 호되게 구짖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재령으로 나가 재령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다. 학생이지만 나이가 20세가 넘었던 터라 조석훈은 학생시절부터 조사로 활동을 했다. 교역자가 없는 미자립교회인 장연군 태탄교회 용현교회 두현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성경학교 졸업후 그는 1929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무려 입학한지 16년만에 1948년 44회로 신학을 졸업했다. 18년동안이나 신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미자립교회를 떠돌며 목회를 하다보니 학비도 여유가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는 신앙혼 때문이었다. 시골교회를 담임하다보니 도시 목사들에 비해서 덜 부딛치게 된 것같다.
1945년 해방 후 고향 송화군 윤리면에서 조목사의 덕망이 돋보여 면장으로 부임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으나 더 유망한 이를 세우라는 말로 한마디로 거절하고 목회일선에만 애쓰던 중 1950년 누리교회에서 6.25를 맞은 것이다. 1950년 6.25가 나자 교인들에게 월남할 것을 권유하고 자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교인도 없는 강대를 지키며 기도생활로 교회를 사수하다가 그해 10월 찬서리가 내릴 무렵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해 올때 공산군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조목사를연행했다.조목사는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마치 무거운 십자가를 질머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를 연상케 했다. 때마침 소달구지가 와서 그를 태우고 어디론가 끌고갔다. 달구지가 외진 산 모퉁이 한적한 곳에 이르자 공산군의 손에 이끌리여 풀숲속에 조용이 세우고 사형을 집행했다. 사형집행이 내려지기 전에 조목사는 하늘을 향해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저에게 마지막까지 성업을 완성케 하셨사오니 감사합니다 이몸 주의 품에 받아주소서"
유족으로 7남매, 맏아들 조의택목사는 공주중앙교회를 시무하다가 은퇴했고 그의 아들이 조성모목사 조윤모목사이고 둘째 아들 조인택목사는 시카고 겟세마네교회를 시무하였고 필라델피아교회 조진모 목사가 그의 아들이다. 셋째아들 조영택목사는 서울 장석교회를 16년 시무하다가 카나다 한인교회로 임지를 옮겼고 아들 조준모는 언어학박사 과정을 하고 성서번역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넷째아들 조유택목사는 남대문교회 시무하고 있으며 서울노회장을 역임했다. 조석훈목사의 맏딸 조선희는 백상근목사 부인이고 둘째딸 조선옥은 선목교회 여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셋째 딸 조송산은 동승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 등 모두 주님을 섬기는 순교의 열매를 맺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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