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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강광범(1910. 7.18~1950. 9.22) 목사
 주제어  [대한민국] [목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공산당에 대항하다 6.25와 더불어 반동분자로 몰려 순교

[순교자,장로교 목사, 평안남도 강서 출생]

1. 신앙의 자유와 애국적 민족후진양육 결심

강 목사의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는 강서학살사건 있은 곳으로 유명하다. 내용인즉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사건으로 전국이 일제히 분기하였던 때 이곳 강서에도 3월 2일 만세시위운동에 앞장서서 시위운동을 하던 옥천교회의 교인 중 6명이 일본 관헌에 체포되었다. 이 이튿날도 사건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원장교회 교인이 선두로 2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면사무소로 물밀듯 밀려가서 옥천교회의 체포된 성도 6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런, 일본 경찰과 헌병은 석방하기는 커녕 체포된 윤관도, 현경묵 등의 6명을 위협 진압하려고 군중들 앞에서 총살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무리들은 치를 떨며 한 판 격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저희 총에 무차별 난사를 당하여 43명의 교인이 죽고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고 부녀자와 참혹하게 총살되었던 사건이 강서학살사건이다. 이렇듯 충절의 고장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1910년 7월 18일 강광범은 출생하였다.

이와같이 충,열,효부,효자의 고장에서 신앙가정을 배경으로 착실히 배우고 보고들은 바를 열심히 몸으로 익히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상업계로 진출하여 이 나라 굴지의 대상인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쪽 방면으로 공부하려고 진남포로 나가서 진남포상공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상공업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신앙생활도 더욱 열심히 하였다.

2. 어려운 환경속에서 신학공부

그러나여기서 차차 생각이 세상적 물질로 축복을 받아 한국이 알아주는 새상인이 되는 것보다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민족의 스승이요, 복음의 대전조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도 신앙의 자유와 애국적 민족 후진 양육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이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벌써 서른 다섯 살이라는 적잖은 나이었다. 여기서 더 주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제41회로 졸업을 하던 해의 신학교는 이 나라 신학교육이 위기에 직면해 있던 때였다. 그것은 1935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의 대세가 집중되어 있는 서북지방의 교세를 꺾어 일본의 전쟁수행에 동원되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최후 거점을 강화하기 위하여 진행된 신사참배 강요는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강요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총회 장소에 틈틈이 끼어앉은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 속수무책으로 진행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해 9월 20일부터 개강 예정이던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선교사들의 결의에 따라 무기연기된다고 발표하였다. 폐쇄되고 만 셈이 되었다.

제 34회 졸업생은 우편으로 졸업증서를 집에 앉아서 받았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총회는 신학교 폐쇄를 방치하지 않고 이듬해인 1939년 3월에 신학교육부가 소집되어 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하기로 교섭하였으나,캐나다 선교본부가 찬성한 이이에는 거부하였다. 총회는 장로회신학교 기성회를 조직하고 위원장 채필근 외에 이사 19명을 임명하고 신사참배를 전제한 변질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이리하여, 1901년부터 시작하였던 장로교 법통의 신학교는 이미 1938년의 신사참배 가결과 더불어 종식을 고하고 말았다. 그 이후 신학교나 총회는 실제로 황민화된 이질적 기독교요, 민족에서도 이단으로 기운 사이비 단체였다고 1935년부터 해방전 가지의 장로회신학교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그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기독교 다음 세대를 절손할 수는 없었다. 강광범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또 그것은 거부되어야 옳은 일이었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그의 신학사상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졸업을 하고 곧 목사가 되어 복음사역에 헌신하였다.

3. 공산당에 대항하다 6.25와 더불어 반동분자로 몰려 순교

이렇게 악몽같은 나날은 흘러 다시 있어서 안될 일제탄압이 종식을 고하는 날이 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들의 패전이었고 이로써 민족에게는 해방의 날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공산당들의 횡포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잔혹한 일제 뺨치는 갖가지의 핍박이 극심한 때에 목회를 하였다. 목사가 된 강광범은 평안 대동군 남곶면 군청 소재지가 있는 평양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 하류에 대이도리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저희 공산당의 주일선거며, 기독교도 연맹의 사이비 어용단체의 속화 만행을 보며 또 수난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반동분자로 내몰리면서 지식인 숙청 등의 비행에 대하여 규탄하며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교육하여 나갔다.

여기서 저들에게 요시찰친으로 낙인 찍혀 늘 알게 모르게 감시를 받으며 박해에 시달리다가 같은 평남 중화군 중화면 성현리 성현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를 당한다. 그 해 1950년 9월 23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소위 반동분자 지식인 숙청이라는 명목아래 체포되어 중화군 중화 경찰서에서 모진 매와 갖은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 경찰 유치장에서 최후를 순교로 아름다운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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