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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김세환(1888-1945) 3.1운동 48인중에 한사람
 주제어  [한국인] 민족운동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수원에서 출생

3.1운동 48인중에 한사람인 김세환 선생은, 1888년 11월 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소년으로서 한참 그의 꿈을 키워나갈 즈음,수원에는 북감리교회의 메리 스크랜톤(Mrs.Scranton,Mary Fitch,183201909)여사에 의해서 기독교가 들어와 보시동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교회 안에다 3.1남.녀학교를 세우고 한참 선교와 구국교육에 힘썼다. 이로 인해서 교회 안에는 당시 도지사 서리였던 김한목(3.1학교 교장)씨 그리고 이하영(3.1학교 교사,후에 종로교회 담임전도사)씨등 다수의 유지들이 모여,교회는 활기있게 자라고 있었다.이러한 때 김세환선생은 소년으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교회안에서 기독교 신앙은 물론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꿈을 키워 나갔다.

선생은 일찌기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어,한국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2. 먼저 교육에 큰 뜻을....

이렇게 큰 뜻을 품고 고향에 돌아온 김세환선생은 수원상공회의소에서 부속사업으로 1909년 창립한 수원상업강습소에서 직조감독관으로 일하며, 동시에 선생으로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다. 이 학교는 사립학교로서 현 수원중.고교의 전신이다. 당시 수원에 있는 상인들이 단결하여 항일투쟁을 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다. 이 학교에서 1916년까지 일하면서 강습소를 화성학원으로 발전시킨 후,밀러(Miss Lula a.Miller,1870- 美羅)여선교사에게 발탁이 되어,1917년 3.1여학교 학감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때 밀러 여선교사는 1909년 3.1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이래 설립자 힐만(Miss Mary R Hilman)씨와 함께 일하면서,1913년 장안동에서 매향동대지에다 교사를 옮겨지으며 1915년에는 강당을 지어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1913년이래 밀러 여선교사가 교육사업만이 아니라 수원지방 부녀사업까지도 맡게 되니,날로 발전하는 학교사업에다가 지방 부녀사업을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로교회의 교인이며 사회의 유지요 교육의 경험자인 김세환 선생을 초빙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후 그는 3.1운동 관계로 몇년 일하지도 못하고 무직 상태에 있는 동안 선교사의 추방으로 3.1남학교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수원의 유지 최상희씨를 움직여 일만원을 희사케하여 폐교 직전의 학교를 구출하며,1941년에 홍사훈선생을 설득하고 그의 도움을 얻어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3. 경기.충청 일원의 책임자로...

이렇게 교육가로 활약하던 김세환선생이 3.1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은 3.1여학교의 학감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학교 교사 초빙문제로 중앙 YMCA간사이며 같은 북감리교회의 교인인 박희도 전도사를 자주 만나는 동안,피차에 신앙과 인격과 사상에 공감되여 같이 일할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차 그의 권유로 1919년 2월 21일 밤,처음으로 이갑성 선생의 집에서 모인 독립모의에 참여하여 거기서 경기.충청도 일원의 운동 책임자로 선임을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충청도 지역은 북감리교회 구역으로 수원과 공주를 각각 중심해서 광활한 지역에 감리교회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목사 가운데도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평신도인 김세환 선생이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된 것은, 그 개인의 고매한 인격과 투철한 독립사상과 그리고 박희도전도사와의 개인적인 인연 등도 있었겠지만,그것들 외에도 또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노블(Noble,William Arthur,1866-1945,)선교사의 영향과 도움이었다. 노블은 1917년 이래 3차에 걸쳐 수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한 선교사로 수원지방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이다.

그는 본래 한국민을 동정하고 사랑하던 이로써 수원지방에 온 이래 독립운동에 뜻을 둔 임응순(1882-1930)전도사를 수원지방의 중심교회인 종로교회의 담임자로 파송하는가 하면,1922년에는 3.1우동으로 옥에 갇히었던 송득후 목사를,그리고 1931년에는 3.1운동의 평양지방의 총책임자였던 김찬홍 목사를 파송함으로 계속 수원지방을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든 선교사이다. 김세환 선생이 그 바쁜 학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경기.충청도 지역을 찾아다니며 운동을 자유스럽게 한 것은 모두 노블의 도움이었다.

김세환 선생은 책임을 맡은 이후로,첫번으로 해미읍내 감리교회에 사경회하러 온 흥성교회의 김병제 목사를 만나 3.1운동 참가 승락을 받은 후, 공주로 가서 감리교회의 목사 현석철을 만나려 했으나 못만나고,그대로 올라와서 박희도에게 보고한 다음, 수원으로 가서,남양교회의 목사 동석기를 만나 승락을 얻었다. 26일에는 이천의 이강백(일명 이강우)목사를 만나 찬성을 얻었고,오산에서 김광식 목사를 만나 찬성을 얻었으며,수원에 와서는 종로교회의 전도사 임응순을 만나 승락을 받아가지고 박희도전도사에게 갔다. 그때는 이미 33인이 결정된 후라 늦어서 안된다고 해서 집에 돌아와 소각하고 말았다.

4. 48인중의 한사람

김세환 선생이 2월 20일,이갑성 선생의 집 회의에서 참석해서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여비로 20원과 동지 모집에 필요한 미농지 15장을 받아 가지고 나온 이래 28일까지,경기.충청도지역 감리교회를 찾아 다니면서 도장을 받은 수가 무려 40명이나 된다. 당시 경상북도를 책임맡은 이갑성선생은 마산 대구 등지로 다녔으나 한사람도 얻지 못해서,재차 다른 사람을 파송해서 전주에서 약간명을 얻은 것을 보면, 놀라운 숫자이다. 김세환선생은 3월 1일 오전 6시 서울로 올라갔다. 가보니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부를 계획이,폭동이 일어나 희생자가 날 우려 때문에 명월관으로 장소가 변경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다가 오후 2시에 파고다에서 모이는 학생들의 선언시에 참석하였고,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당주동,종로,무교정,경성일보 앞까지 갔다가 집에 돌아와 13일에 체포되었다. 그가 3.1운동을 계획하고 가장 열렬히 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33인에 들지 못한 것은,독립운동은 이번 한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제2,제3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었고,또 제1선에서 희생되는 이들의 뒷바라지를 맡는 이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운동 초기에 중심적 역할을 한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이나, 천도교에서 운동자금 조달을 맡았던 박인호,노헌용,기독교계에서 역시 핵심인물 중에 하나였던 함태영등과 함께 33인에 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는 33인중 상해로 탈출한 김병조나 예심 중에 옥사한 양한묵외 31인과,제2선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던 인사들, 또 문서의 대외전달을 맡았던 인사들, 또 학생동원을 맡았던 이들 그리고 황해도 수안사건의 주모자들, 모두 17인이 경찰의 심문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예심을 거쳐 한사건으로 묶어져 소위 48인이 된 것이다. 김세환 선생은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일.한 합방에 대하여는 어떠한 감상을 가졌나?" 그때 그의 대답은

["아무리 세계 대세로 합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이슬도 눈물인가 하는의심을 품을 지경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래에 정정당당히 조선사람은 권리를 찾고,일본사람은 권리를 돌리어 보낼 시기가 올 줄 안다"] 라고 했다. 다음으로 "피고는 금후로 조선독립을 위하여 활동할 것인가?" 그때 그의 대답은 "그렇다"라고 간단 명료했다. 33인의 이에 대한 답변을 분석해 보면,한.일합방에 대한 질문을 받고 찬성했다는 이가 6명이요,이것조 저것도 아닌 중간이 1명이요,반대했다는 이가 26명이다.또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앞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이가 3명이나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의 김세환 선생은 대답은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다.

5. 묘는 국립묘지 충렬대에...

김세환 선생은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 재판엣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서방되었다. 그가 1년 반동안 수감되었다가 돌아왔으니 예전의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방의 날까지 그냥 집에 머물러 있다가 병중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으나 해방된 밝은 낮에 활보 한번 못해 본채,1945년 9월 16일 향년 57세로 그의 생을 마치었다. 그후 5.16혁명정부는 1963년에 그에게 건국 무공훈장을 추서하고 1968년에는 그의 묘를 국립묘지 충렬대에서 이장하였다.(홍석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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