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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김순효(1902. 5.15~1951.?) 여자선교사, 한국최초 장로교 전도사 중국선교
 주제어  [한국인 순교자] [대한민국] [선교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했으며, 정신학교를 거쳐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장로회 총회에서 최초의 여자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됐으며 해방 후 중국의 공산화로 귀국하여 1950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새벽기도 하던 중 공산당에게 살해당하였다.

 

명신학교 졸업. 정신여학교 졸업. 요코하마여자신학교 졸업
동부교회 전도사. 신의주 제4교회 부임
1931. 9 산동성에 선교사로 파송
평야여자신학교 교수 겸 기숙사 사감

 

1. 경건한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 신학공부에 몰두

김순효는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가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분골쇄신 선교성역에 몸바쳐 일하다 세게 제2차대전 종전과 함께 대륙이 공산화되어 귀국하였다. 그는 신학교,여자부 사감을 거쳐 최북단 신의주 제2교회를 섬기다가 1951년 어느날 새벽,제단에서 기도하던 중에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의 영관을 썼다.

김순효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출생하여 경건된 신앙 분위기에서 엄한 생활로써 연마한 고매한 신앙의 인격을 길렀다. 그는 그곳 명신학교에 다녔다. 일찌기 이 학교는 심순효가 다니는 재령읍교회(후에 재령동부교회) 역사와 함께 발족하였는데 어려운 학교 사정을 평양의 송정신을 거쳐 헌트 (Hunt,William B.)에 의해 해결되었다. 헌트는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재령 선교의 공로자다. 그는 천주교가 드센 곳이라고 발붙일 엄두도 못낼 곳에다가 교회를 세우고 동시에 이 명신학교가 정식학교로 면모를 갖추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학생들을 철저히 교육해 나갔다.

여기서 김순효는 교육을 받고,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기독교명문정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 여성이 학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서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과정을 이수하고 곧 귀국하여 다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연구에 몰두하였다.

2. 중국선교사로 파송 만주를 누비며 복음전파

졸업을 하고 그 길로 고향인 황해도 재령으로 돌아가서 모교회인 재령 동부교회에서 4년간교회를 받들었다. 이때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 총회에서 의결된 안건의 하나는 해외선교활동의 전개였다. 그리하여 1913년 김영혼, 사병순, 박태로 등 세선교사를 임명하여 중국 산동성으로 파송하였다. 이 세분의 선교사가 현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서 여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총회에 청원을 해왔다. 총회는 이 청원을 접수하고 인선을 서두르는데 여러 사람을 물색하던 중에 김순효 전도사가 발탁되었다.

총회가 파송하고,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선교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1931년 9월에 중국선교를 위해 장도에 올랐다. 임지에 무사히 도착하여 예상은 했지만 이상의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이역만리 타국에 이방인 상대의 선교란 국내에서도 쉽지는 않은데 언어와 풍습마저 익혀가야 하는 선교사 수업은 아무리 사명자라고도 하더라도 역시 약한 여성임에도 어쩔 수가 없었따. 외롭고 쓸쓸한 데다가 밤이면 불안하고 때로는 공포심에 잠을 못 이루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런 갈등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은 모진 마음까지 먹은 때가 있었다. 이 때다.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힘서 기도하여 새 힘을 얻어야 하느니라"는 음성이었다.

이것은 내게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도 믿는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된다는 일에 앞서 3층 다락으로 올라가 두문불출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했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 여기서 새 힘과 용기 그리고, 사명감을 부여받는 듯하였다. 이제 만나는 이들마다 전도할 때 생각 의뢰로 많은 믿는 자가 돌아오고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인 줄 분명히 깨달았다. 현지적응이나 전도생활에 푹 젖어들던 1938년이 돌아왔다. 이 해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일단은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어 청도로 잠시 피했따가 이듬해 만주 길림성으로 선교지를 옮겨 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은 가는 곳마다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더욱 어렵기는 1943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더 그랬다. 일제의 압력은 더욱 심해지고 국내로부터 선교비도 끊기고 말았다. 이와 같이 몰아닥친 시련을 그대로 앉아서 당할 분도 아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칠전팔기의 기도와 믿음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었다. 그는 동만주 일대를 누비면서 순회전도와 부흥집회 인도를 쉬지 않았다. 가는곳마다 은혜가 충만하였고 성령 또한 충만하였다.

3. 해방과 더불어 귀국 교회를 지키다 순교

드디어 일제는 패망하고 민족은 해방되었다. 태극기 물결과 애국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 기쁜 소식도 잠시 임지인 중국 땅에는 공산화 되기 시작했고 이를 피할 곳이라고는 그 어디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귀국하는 도리밖에 없어 서둘러 귀국하여 평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평양신학교 여자부 사감으로 있으면서 교수도 겸했다. 여기서 서울장로회 신학대학 대학원장을 역임한 주선애, 경민교육재단 이사장 이연옥을 비롯하여 이동선, 조순덕을 각각 길러냈다. 진실하기가 그지없는 믿음의 감화는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북한 전역의 교회들은 날이 갈수록 그 정세가 험악해져갔다.

신학교마저도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길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청빙도 있어서 부임차 떠나게 될 때 그를 아끼는 모든 이는 말렸다. 한걸음이라도 남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그러나 김전도사는 "모두가 다 살기 위하여 남으로 가지만 나는 복음을 위하여 죽으로 북으러 간다"는 말과 함께 임지인 신의주제2교회로 갔다. 김전도사는 교회의 양무리들과 교회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키다가 1951년 어느날, 그날 따라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를 하는데 느닷없이 몰아닥친 몇몇의 내무서원이 그대로 개 끌듯이 끌고 나가서 연약한 여성의 몸에 감당키 어려운 매를 가하니 맞아 쓰러진 것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길로 주님 따라 피를 흘리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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