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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6
 제목  김익두(金益斗, 1907-1970)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기독교 박물관 건립
 자료출처  목양신문  성경본문  
 내용

장로교 목사. 고고학자 항일독립운동가
호는 매산

 

1. 성장배경

1907년 2월 13일 평북 의주군 피현면 당후동에서 김관근 목사와 어머니 백관성권사 사이에 4남 1녀중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외주부 백홍준은 1876년 만주에서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고 1883년 고향인 의주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며 집회를 가졌다.

조부인 김이련은 외조부와의 사이에 친지였으므로 백홍준의 전도를 받자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1889년 그의 아버지 김관근 어머니 백관성 그리고 고모인 김윤백과 외조무 한씨등이 가족 전부가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소위 [한국의 요단강 세례]를 받았다.

한씨는 1894년 2월부터 마펫선교사로부터 매달 4불씩 대우를 받는 한국최초의 여성전도사가 된 인물이다.
김양선의 조부는 명문에 이름있는 인사였으므로 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외조부가 1893년 감옥에서 순교하자 뒤를 이어 의주교회의 조사가 되었고, 1910년 목사의 임직을 받았으며 그 이래로 교회 전도 사업과 종교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2. 숭실전문재학 (한국교회사 정립에 뜻을 둠)

김양선은 1921년 아버지가 설립한 중원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6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다시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에 입하였다.

동교 재학시절에 그는 역사 연구에 몰두했으며, 특히 한국의 기독교가 그의 집을 통해 전래되었고, 한국 초기교회가 선조의 힘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에 한국교회사 정립에 뜻을 굳혔다.

외조부. 조부. 부친의 책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다 보니 최초의 한글성긴 [예수셩교젼셔],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찬숑시].최초의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의 신문]등 5백권이 넘는 한국교회 최기 출판물 귀중본들이 수집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연구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져 온갖 정성과 재력을 모두 여기에 바쳤다. 한국교회사는 물론 고고학에까지 범위를 넓혀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수집되었다.

한편 천주교와 실학관계 연구에도 깊이를 더하였다. 이러하여 그는 해방 직전까지 5천이 넘는 귀중사료를 수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3., 항일운동

1927년 그는 숭전재학시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배민수.문학린의 학우 동지들과 함께 [청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으며 1928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평양시내 학생들이 시위활동을 주도하여 조국광복운동에 기치를 높이 들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았으며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 이후에도 일제 신사참배 반대사건 등으로 다섯차례나 투옥되어 고생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기 얼마전 1934년 그가 시무하고 있던 정주중앙교회가 폐쇄되었고 김목사에게는 함구령과 금족령이 내렸다. 평동 노회장, 총회평안교구장 등의 여러가지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조부모의 묘소가 있는 구성 신시로 피신하여 마을로부터 아주 떨어져 있는 벽지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귀중사료를 보관하기 위하여 3.1 운동 때 사진 30매를 베개속에 넣어주었고 안중근 의사의 옥중유필과 태극기는 이불속에 감추었으며, 폐교당한 숭실학교의 대리적 간판은 다리 미판같이 만들어서 보존에 갖은 애를 다 썼다.


4. 기독교박물관 건립 (남산에)

조국이 광복되자 그는 상경하여 꿈에도 소원이던 기독교 박물관을 남산 조선신궁터에 짓기를 설립허가를 취득했다.
설립위원회 화장에 함태영목사, 부회장에 노기남 주교와 백낙준박사를 위임하여 자신은 총무로서 개관준비를 하였다.
문제는 그의 수집품 전부가 북한에 있어 38선이 굳어가는 때에 운반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 한필례는 세차례나 왕래하면서 물건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녀는 47년 4월 해주 앞바다에서 공산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48년 4월 20일 남산에 한국기독교박물관과 매산고관을 개관하면서 그녀가 희생되면서 가져온 귀중 자료들과 순교자의 피로 물들어진 고귀한 유물들이 진열되었다.


5. 기독교박물관(숭실대에)과 소장품

그후 이 박물관이 6.25 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다시 재건하면서 한때 일본 토오쿄오 제국대학의 창고와 미국 뉴욕연합장로회 선교본부로 가져갔던 것을 모두 모아 67년 10월 10일 모교인 숭실대학교의 개교 70주년 때 전부 기증하였고, 현 기독교박물관(숭실대학교 구내)를 재건하였다.

소장품 중에는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청동기시대의 국보 141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뉴기하학문경, 비파형동검,용원,스키티안 동령,1883년 김홍집총리대신이 작성한 단발령,1711년의 조태억 사절과 일본의 아라이와의 담론인 강관필담,최남선 작성의 독립선언서, 그리고 김일성이 사용한 금강산병풍,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안중근의사 유묵등 다방면으로 소장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관계 사료로는 마테오 릿치 선교사가 만든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인 1603년 작품인 양의현람도 통일신라시대의 경교석재십자가 635-641년대의 당에서 퍼진 경교성서,금가산경교비탁본, 1882년 만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성경인 로스번역 누가복음, 1887년 간행된 예수셩교젼서, 1884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제작된 이수정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 등 총합 3,660점에 달하고 있다.


6. 활동과 업적

이 기독교박물관이야말로 김목사의 필생의 사업의 결실로 그의 피와 땅과 생명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는 한국고고학협회 부회장, 한국대학박문관협회 회장 및 이사, 서울특별시 문화보존위원,국보 명승고적 천연기념물 보존위원 등도 역임했다.

그는 교회사가라소 장로회신학대학.감리교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등 신학교에서 교수하였으며, 숭실대학에서 국사학 분야를 연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고고학.미술사등을 강의하였다.

김목사는 1966년 백낙준.한태동. 마펫(Samuel H.Moffett) 박사등과 함께 한국교회사학회를 창립하는데 주동하였으며 1967년에 한국 기독교문화연구소를 개설하였고, 한국사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50종이 넘는 사학부문의 논문을 학계에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사의 정립을 목표하여 전래.포교.부흥.수난.재건 등 다섯권의 교회사 저서를 완성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재건편인 해방 10년사만을 내고 별세하였다. 못다 이룬 그의 유업은 조카이며 한국교회사 연구원장인 김광수 목사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그의 1주기 기념으로 유작<한국기독교사연구>가 출판되었으며, 2주기에는 <매산국학산고>가 간행되었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지극히 흠모하였으며 유물.유품등을 수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안중근 의사 선양회이사. 안의사숭모회부이사장이 되어 남산의 안의사기념관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그가 얼마나 나라사랑에 전심전력했는가는 그의 지난날 행적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 독립유공자상훈심의회위원, 독립운동자료조사위원역임 등의 활동이 말해주고 있다.


7. 목회사업

그의 목회사업은 평북 곽산교회와 정주 중앙교회에서, 해방 이후에는 서울 성도교회와 옥인교회를 창걸하는데 공이 컸으며 특히 범교단적으로 활약하였다.

기독교단체 연합구국회 대북방송위원으로, 북한교회재건위원으로, 순교자기념설립위원으로, 휴전반대 구국신도 대회총무로, 더우기 1.4후퇴 때에는 부산에서 기독교연합싸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총무로서 활동하였다.
회장인 한경직목사,부회장인 유형기 감독을 미국으로 가도록 하여 한국민의 참뜻을 미국 정계 인물들에게 전달함과 함께 전국교회를 순회하여 미국의 한반도 철소를 철회케 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육영사업을 위해서도 정주에서 평동중학교를 창립하였고 보성여자고등학교교장을 역임했으며, 그의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과 숭실대학을 서울에서 재건하는데 주력하였고 줄곧 숭실대학 캠퍼스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11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숭실대학장으로 동대학교 구내 웨스터민스터교회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장로교 목사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고종 11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아버지 응선(應善)과 어머니 전익선(田益善)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김익두는 한때 상업에 종사했으나 실패했으며,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 유산을 탕진하는 등 어려움을 겪자 삶에 회의를 느꼈다.

20세 이후 청년시절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싸움과 술주정을 일삼아, 인근 고을에서 '개망나니 김익두'로 불릴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27세 되던 1900년 봄에 김익두는 친구 박태환(朴泰煥)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던 금산교회에 갔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L.)의 '영생'(永生)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신약성서를 1년에 100번이나 독파하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하였다. 그후 1901년 7월에 김익두는 부인,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친구의 강권에 못이겨 술을 마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뛰쳐나온 김익두는, 산에 들어가 대성통곡하며 회개기도를 하는 가운데 큰 불덩이가 몸에 떨어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이 때 '가슴을 칼로 찢는'것 같은 성령의 내적 임재(臨在)를 경험한 그는 다시는 약해지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김익두는 1901년 10월 재령(載寧)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의 권유를 받고 교역사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왈렌으로부터 전도실력과 신앙을 인정받은 그는 1903년에는 신천(信川)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신천에서도 그는 새벽기도, 신약과 구약을 하루에 각각 2장씩 숙독, 냉수마찰, 가정에서 하루 3번 예배 등 스스로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항상 손에 성경을 들고 틈 나는대로 읽었으며, 길을 걸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습관이 생길 정도로 열중하였다. 김익두는 1906년 3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다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1년 어느 날 김익두는 마가복음 9장 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에 홀연히 확신을 얻고, 신유(神癒)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힘써 기도하다 마침내 신유의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에 의한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重生)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 등이 중심이었는데, 설교에 나타나는 신비스런 능력과 매력에 청중들이 도취되었다.


 

1919년 가을부터 김익두는 서울의 남문밖교회에서 이재형과 함께 시무하였다. 이곳에서 김익두의 겸손한 태도와 기도생활, 능력있는 설교, 성경사랑과 해박한 지식 등이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는 여러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1919년 10월 강동(江東)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본격적인 신유의 능력을 갖춘 그는 그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 사경회 때 턱이 떨어진 박수진(朴守眞)이라는 걸인을 낫게 한 일이다. 이후 1920년 4월 영남지방 집회 때에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그는 '권능(權能)의 사자(使者)'로서 전국에서 부흥회를 열면서, 도처에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을 일으켰다.

1920년 6월 31일 평양의 연합부흥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6,00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이후 그가 제 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된 후 그 해 10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2주일간 열린 연합부흥회에는 연인원 1만여명이 참석하여 철야기도를 올리며 통회자복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김익두는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17년 된 혈류증 환자가 쾌유되며, 소경이 눈을 뜨는' 이적을 일으킨 인물로 소문났다.


 

한편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로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기독교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김익두 등의 부흥사들을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체현하는 것보다 미설(迷說) 기적을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한편 황해노회에서는 1919년부터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중심이 되어 '김익두 목사 이적증명회'를 구성하고 3년동안 그를 통해 치유받은 자들의 신상과 기록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21.7)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근거로 황해노회는 1923년 총회에서 "금일에는 이적(異蹟)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1조를 수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건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 총회를 계기로 김익두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다. 총회의 '이적 불인정'은 그가 여는 부흥회의 의미를 감소시켰고 당시 교회내 지식계층이나 일반 사회주의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급격히 냉각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한 그는 이후로는 병을 고치는 이적을 삼갔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익두는 일본경찰에 강제로 연행되어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를 기독교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선전자료로 삼았다. 그러나 1942년에는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15일간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는 함구령을 내려 그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직전리에 있는 과수원에 가두고 목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광복후 북한에서는 1946년 11월에 어용기구로 기독교도연맹이 만들어졌다. 당시 김익두는 이 단체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1949년에는 그를 기독교도연맹 총회장에 임명하였다. 이는 그의 제자이자 김일성의 이종사촌인 전 목사 강양욱(康良煜)의 강권과 감언이설에 의한 것이었다.


 

1950년 10월14일 새벽 김익두가 신천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후퇴하던 인민군이 난입하였다. 인민군들은 쫓기는 화풀이로 그를 총살시켰으며, 이 때 이를 말리던 신도 5명도 함께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교회정원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29일 신천군 제직회 주최로 신천지역 50여개 교회가 모여 서부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려 50여년 동안 김익두는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50여 곳에 새로 교회당을 세웠다. 또한 2만 8000여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아니라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아울러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르렀다.

그가 남긴 저작으로는 부흥회 설교 13편을 모은 '부흥회설교집'(1940년)이 있다. 김익두는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가로서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표하는 '이적의 부흥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3·1운동 뒤 민족적 좌절을 겪고 사회변화와 각종 이데올로기의 대두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폐허의 한국교회에 영적인 재각성을 도모하여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며, 신유의 신앙운동으로 재기의 에너지와 열기를 주었던 목사였다.


 

아울러 그는 19세기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Moody, D.L.)에 비견하여 '한국의 무디'로 평가되었다. 또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여 '과학을 초월한 불가사의를 행한 자' '신비의 잠을 깨운 자' 등으로 불리며 이후 한국교회의 독특한 부흥회의 전범을 마련한 영적 능력을 지닌 목사로 기억되고 있다.


/김 탁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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