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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27
 제목  3·1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주제어  삼일운동
 자료출처  서울600년사  성경본문  
 내용

[독립선언서]

 

거족적인 3 1운동의 거사계획은 비밀리에 추진되었고, 예정대로 3월 1일 정오부터 민족대표 33인중 29인(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불참)은 태화관에 모여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려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 오자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가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註33]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시내 남녀중학생 이상의 학생이 4∼5,000명 모였다. 학생들은 이미 강기덕과 김원벽의 연락을 받고 오전 수업을 마친 후 학교 단위로 모였으며 경성의전(京城醫專) 학생들은 만약을 위하여 당일 아침부터 전원 결석하고 그 시각에 모이기로 하였다.[註34] 그리고 이날 새벽 서울의 거리에는 각종 격문과 독립운동의 정확한 소식을 알리기 위한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제1호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함께 민중에게 배포되었다.
「조선독립신문」은 2월 28일부터 천도교의 박인호(朴寅浩) 이종일(李鍾一) 이종린(李鍾麟) 등에 의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普成社)에서 준비되어 보성전문학교장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간행된 것이다. 그 후 이들은 곧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이 신문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간행되었고, 일본 총독부 도장관보고(道長官報告)에 의하면 27호까지 간행되었다.[註35] 또 이날 새벽 동대문과 남대문 등 큰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어 있었다.

「희(噫)라 아(我) 동포여 군수(君讐)을 쾌설(快雪)하고 국권을 회복할 기회가 왔다.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써 대사(大事)를 공제(共濟)함을 요한다.[註36] 」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파고다 공원 팔각정 단상에는 10년만에 태극기가 내걸리어 모인 군중들의 감격과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드디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식전이 개막되었다.
이 식전에 33인의 민족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鄭在鎔)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날 무렵 군중속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註37] 당시 탑골공원에는 서울시민과 고종 황제의 국장을 보러 올라온 지방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이같은 당시의 독립운동 상황은 천도교에서 비밀리에 간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는
「탑동공원(塔洞公園)에 회재하였던 수 만의 학생이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면서 수무족도(手舞足蹈) 풍탕조용(風蕩潮湧)의 세(勢)로 장안을 관중(貫中)하니 고목사회(枯木死灰)가 아닌 우리 민족, 금어롱조(金魚籠鳥)가 아닌 우리 민족으로 수(誰)가 감읍(感泣)치 않으리요.[註38] 」라고 보도하고 있다.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군중들은 공원문을 나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행진 대열은 학생 · 신사 상인 농민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담하여 서울시가를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은 민족대표들의 예상대로 국장(國葬)으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수십만 민중이 거리로 뛰쳐 나왔고 또 서울시민이 만세시위행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행렬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경성부윤(京城府尹)과 경무국(警務局)의 보고에 의한 이날의 운동상황을 보면 종로통(鐘路通)에서 군중은 중심체인 학생시위대의 분열에 따라 여러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져 일파는 2열 종대로 종로에서 광교 부청 앞 남대문 등을 거쳐 남대문 정차장(서울역)을 돌아 의주통(義州通)으로 꺾이어 프랑스공사관으로 행진하였다.[註39] 다른 일파는 종로에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일부는 제지하는 일군경(日軍警)을 물리치고 대한문 안에 들어가 고종 황제의 영전에 조례(弔禮)를 행하고 나왔다.

 

그후 대한문 앞 광장에서 독립연설회를 가진 다음 구리개(현 을지로)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갈린 일파는 미국영사관 앞으로 행진하고, 일파는 종로에서 지금의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앞에 집합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한 다른 일파는 창덕궁 앞으로 행진하였으며, 다른 일파는 일제의 조선보병사령부(朝鮮步兵司令部) 앞으로 행진하여 영내까지 들어가려 하였다. 그 밖에도 일파는 소공동을 거쳐 총독부 쪽으로 향하려고 진고개(현 충무로)로 행진하였다. 좁은 골목에는 일제의 기록으로도 6천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어 제지하는 일군경의 저지선을 두번이나 뚫었다고 한다. 이 만세시위행진 중에 미국영사관 앞에서는 한 학생이 '조선독립(朝鮮獨立)' 이라고 쓴 혈서를 들고 시위하다가 미국영사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註40] 또 서울에서 가장 넓은 육조 앞(현 세종로) 거리도 만세시위군중으로 메워졌는데 이때 군중 속으로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던 일본인 경기도지사(京畿道知事)가 군중들의 강요로 모자를 벗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웃지 못할 장면도 벌어졌다.


만세시위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시가지에서 교외로 번져나가 오후 8시경에는 마포 전차종점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이 시위하였고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부근에서는 학생들이 오후 11시 경까지 해산하지 않고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이날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수십 만명의 군중이 활동하였는데도 단 1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가장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의지를 표시하려는 것이 3 1운동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일제는 군국주의(軍國主義)의 본성을 드러내어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 이외에도 용산에 있는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동원해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註41] 그러나 빈손일망정 결사적으로 졸진하는 시위 행렬은 막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진고개에서의 시위행렬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 군중을 체포하였고,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 29명을 포함하여 약 130여명을 체포하였다.[註42] 이날의 시위운동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었다.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와 평북의 의주 선천, 함남의 원산 등지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비슷한 시각에 독립선언식을 전개하였다.[註44] 이날의 서울과 이북 6개 도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은 거족적인 3 1운동의 전체로 볼 때 그 첫 봉화에 불과하였다.
서울은 3 1운동의 전국적인 진원지이므로 3월 1일의 수십만 대시위에 이어, 2일 이후에도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4월초까지 1개월간에 걸쳐 매일 계속되다시피 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의 주도체는 각 종교단체 신도, 각급학교 학생, 노동자와 지방에서 국장을 보고 참배하러 상경한 사람까지 참여한 각계 각층과 각 지역인의 통합으로써 전국적인 운동의 축소판이나 다름이 없었다.[註44]


서울의 운동규모는 3월 1일의 수십 만명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소규모로 변하였다. 서울의 시위상황을 살펴보면 2일에는 주요 시가지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국장 참배차 상경하여 만세를 불렀던 인파로 뒤덮였으며, 종로거리에는 노동자와 학생이 중심이 된 약 4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방면으로 시위하였다. 이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20명이 체포되었다.
3일에는 고종 황제의 장례식이 훈련원에서 거행되었으므로 민중들은 조례(弔禮)를 표하느라고 시위가 중단되었으나 밤에는 신정(新町, 현 묵정동) 쪽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군중 속에는 서양인이 4,5명 끼어 있어 일경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기도 했다.[註45]


4일에는 각 학교 학생이 거의 결석하고 지방학생들은 귀향하여 만세운동의 추진을 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시내 요소 및 전차 등에는 각종 격문과 국민회보(國民會報) 등이 나붙어 민족 운동을 고취시켰다.
5일에는 남대문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사이에서 큰 시위가 발생하였다. 오전 9시 역광장에서 독립연설회(獨立演說會)가 개최되고, 일단의 학생은 평양에서 일반 여행자를 가장하여 상경한 약 300여명의 학생을 맞이하여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에 들어가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였다. 학생 중에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격문을 일반에게 배부하여 많은 군중이 이에 가담하였으며 몇 차례 일군경(日軍警)의 저지선을 뚫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은 서울의 학생 활동이 너무 완만하다하여 각 도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재경학생을 도와 주었다.[註46]
이날은 남대문역 광장에서 뿐만 아니라 대한문 앞과 종로 등지에서도 남녀학생 및 일반 군중이 모여 시위하였는데 대한문은 3 1운동 이전 고종 황제가 아관(俄館)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항일 민중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 때 모인 군중은 일제측 기록에도 약 10,000명에 이른다고 하였다.[註47] 일제측 기록은 3월 1일의 시위도 겨우 3 4,000명의 시위 군중이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날의 시위 규모는 대단히 큰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이날 주동자로 체포된 자는 100여명이었다고 한다.[註48] 또 특기할 만한 것은 이날부터의 시위에는 종래 참가하였던 중등 이상의 학생들만이 아니라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시위행렬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종로 보신각(普信閣) 앞은 서울의 만세시위운동 중심지로서 3월 1일부터 계속적으로 일어난 만세시위는 거의 다 이곳이 중심이 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보신각 종도 울렸으며,[註49] 2차 대규모 시위인 3월 5일의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대로 나누어졌던 모든 시위대는 정오 경에 모두 이 곳에 집결하여 일군경과 충돌하면서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다. 5일의 시위 후 며칠간은 대운동을 기획하는 학생과 일반인을 일군경이 대대적으로 검색하였기 때문에 서울 중심가에서는 표면적인 시위가 크게 벌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교외와 고양 시흥 등 서울과 인접한 각 군 면의 만세운동은 격렬해진 듯하다. 일군경의 대대적인 검거의 예는 송현동 62번지 이인식(李仁植)의 집에서 독립운동차 귀국한 동경유학생들을 합한 시내학생 63명의 운동모의현장(運動謀議現場)의 급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시내 곳곳에서 40여명이 더 체포되었다.[註50] 그러나 지방민의 상경과 서울운동을 돕기 위한 지방 학생의 결사대 조직으로 서울은 일군경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운동이 추진되었다.
3월 9일부터는 서울의 상인이 일제히 동맹하여 철시하였다. 4월초까지 1개월간 계속된 철시(撤市)의 동맹공약서(同盟公約書)는 다음과 같다.[註51]

 

「 9일 일체(一切) 폐점(閉店)할 것.
시위(示威)에 가담할 것. 단 폭행(暴行)은 하지 말 것.
위약(違約)한 상점(商店)은 용사(容赦)없이 처분할 것.」

일군경은 이 동맹을 철회, 개점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였다. 심지어 총구를 들이대고 개점(開店)을 강요하였으니 상인들은 마지못하여 개점할 경우 그들만 돌아서면 다시 상점을 문을 닫고, 또한 부청 경찰서 등에서 상인을 불러다가 개점을 강요하면 운동에 의하여 구속된 자를 석방하면 개점하겠다는 등의 대담한 요구로 일제측을 곤란케 하였다.
이 상인들의 철시와 아울러 8일부터는 각종 공장직공이 파업 저항과 집단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같은 행동을 가장 먼지 시작한 곳은 총독부 경영의 용산 인쇄소 직공들이었다.[註52] 8일밤 야간 작업을 하던 직공(職工) 200여명은 갑자기 일을 중단하고 뛰어나와 만세시위를 벌이자 부근의 일반 민중이 이에 가담하였다. 일군경과 소방대가 동원되어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동자로 보이는 20여명을 체포하였다.[註53] 그후 철도국(鐵道局) 직공, 연초회사(煙草會社) 직공들의 시위가 있었고, 10부터는 전차운전사(電車運轉士)가 가담하여 서울시내의 전차는 모두 운행되지 않았다. 이 저항운동에 가담치 않고 운행한 전차는 시위군중에 의 해 모두 파괴되었다. 일경의 3월 15일자 보고[註54] 에 의하면 이같은 파업이 성행하여 서울시내의 대부분의 공장은 직공이 10% 정도밖에 취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의 시위는 3월 22일 오전 9시에 봉래동 방면에서 일반 노동자 수 백명이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어 서울은 다시 만세시위운동으로 휩쓸리게 되었다. 봉래동 철도교차점 부근에서 4,5명이 태극기를 세워놓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부근에 모인 전차 차장, 공장 직공, 노동자, 일반시민 등이 합세하여 수백 명의 군중이 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의주통을 향하여 독립문까지 행진한 것이다. 이 사이 시위군중은 점점 더 증가하여 시위대는 종로 본정(충무로) 경찰대원과 고양군청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과 충돌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또 이날 밤 11시경에는 종로 단성사(團成社)에서 활동사진의 상영 중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註55]


다음 날인 23일에는 오전 9시경부터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다. 훈련원 부근, 동소문내, 미생동(도원동), 원효로, 창덕궁 앞 등 각처에서 50명 이상 500명 이하의 군중이 모여 24일 새벽까지 제지하는 일군경에게 쫓기면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 이 날 교회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여 시내의 시위군중에 호응하였다. 그 중요한 곳으로는 동묘리 돈암리(현 돈암동) 청량리 왕십리 마포 양화진 수색 녹번리 동막 양진리 행주 창천리 구파발리(이상은 현재 서울시에 편입되었지만, 그 당시는 고양군내였다) 등이었다. 그리고 이날 정동과 어의동의 보통학교에서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졸업식 도중 전학생이 독립만세를 외쳤다.[註56]


위와 같이 22일부터 다시 벌어진 서울의 시위운동은 26일과 27일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26, 27일 양일간은 3월 1일과 마찬가지로 서울이면 어느 곳을 막론하고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주와 전선에는 태극기 격문 등이 붙어 있었다. 와룡동과 재동의 일경파출소에서는 시위군중이 피수인(被囚人)의 구출을 기도 투석(投石), 습격하여 폭력사태가 벌어졌으며 일군경의 발포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27일의 시위에는 만철경성관리국(滿鐵京城管理局) 직공 800여명이 원효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3월 하순부터 격렬해진 서울의 시위운동은 일군경의 저지와 그들의 무자비한 발포로 4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4월부터는 표면적인 시위운동 보다는 비밀결사라는 새로운 양상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일에 시작하여 4월초까지의 서울의 총 시위 회수는 64회이며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약 57만명에 이르고[註57] 피살자가 5명, 피상자는 69명, 피수자는 12,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註58] 그러나 실제의 통계숫자는 발표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3 1운동의 행동대원으로서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학생의 활동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은 3 1운동의 중앙지도층 인사들이 투옥되어 투쟁의 대열에서 멀어지고 민중에게로 넘겨지자 당시의 유일한 조직세력이었으며, 실천력 있는 행동으로써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출처 : (주 참고) 서울600년사

참고자료 : 삼일운동의 배경유관순 유관순의 신앙과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기독교, 전주의 삼일운동, 삼일운동과 제암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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