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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8-08-17
 제목  징기즈칸(Chingiz Khan, 成吉思汗(성길사한), 1155?~1227.8.18)
 주제어  징기스칸 [몽골인물]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러시아 바이칼호 근처에서 1155년경 태어났다(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 1162년, 1167년 등의 이설이 있다. ). 1189년 몽골씨족연합의 맹주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병명으로는 묘호(廟號) 태조(太祖), 아명 테무친[鐵木眞]이 있다.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1206년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1215년 금나라의 수도 베이징에 입성했으며 1219년에는 서역 정벌을 떠나 인더스 강변까지 진출했다. 다른 종교와 문화에 관대했으며 특히 위구르 문화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어 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1189년경 몽골씨족연합의 맹주(盟主)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01년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하였으며(1203), 군제(軍制)를 개혁한 후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년 오논 강변 평원에서 집회를 열고,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천호 및 그 하부조직인 백호는 동시에 행정단위이며, 천호장·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여, 이들을 좌익(左翼)·중군(中軍)·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 두었다.

또 케시크테이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 특권을 부여,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를 구성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서하(西夏)를 점령하고, 금(金)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1215). 한편 앞서 멸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병합하였다(1218). 또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패자(覇者) 호레즘국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西征)에 올랐다(1219).

 

오트랄·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고(1220) 다시 캅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제공()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을 이룩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주기로 하였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 시장[西] 강변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특히 위구르 문화에 애정을 갖고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다. 그것을 국자()로 채용하였으며,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또 요(遼)나라 유신() 야율초재()와 위구르인 진해()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화레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한 이슬람 대상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화레즘의 왕은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화레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화레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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