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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10-04-01
 제목  김윤택(1920. 9.30~1950. 8.?) 전도사
 주제어  [대한민국] [전도사] [순교자] [한국전쟁]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20년 9월 30일 평북 강계에서 김재용 장로의 막내아들로 출생. 공산당의 형무소에서 패퇴하는 공산당에 의해 사살되었다.

 

진남포상고학교 . 함흥고등보통학교.
1944년 요꼬하마공업기술학교 졸업.
흥남 비료공장 산업선교 요원
1946년 11월 3일 선거반대. 신사참배 반대.

 

1920년 9월 30일 출생. 부-김재용장노. 모-전재순집사
평안북도 강계시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나다. 기독교신앙은 카나다 선교사 하렌과 선천읍교회의 Norman Whittinove(魏大模)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다. 정의심에 투철한 성품으로 독립성이 강했다. 외유내강의 개성을 지녔다. 父母님은 강계지방의 순회전도를 온 마포삼열 목사(1918)와 S.G. Gale 목사 평북 의주출신인 백홍준조사(장노)의 인도로 믿음생활을 시작함.

 

1928년 <야소교>가정에서 자란 소년으로 교회의 뒷산에 올라가 어름수건 목욕을 하고 소명을 갈구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 묵상중에 은혜 받은 구절이 에베소서 3:19-20절이었다.
1929년 한문공부를 열심히 수학하였으며 <사서삼경>을 터득하였다. 어학공부에 탈렌트를 가져서 한약자재를 무역하던 증조부 할아버지로부터 중국어를 그리고 영어를 수학했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눈 속에서도 개근 출석했다. 총명성을 발휘하여 향학열이 높아서 ‘일호쟁이“별명을 지녔다.


1933년 신학문에 관심이 높아서 진남포의 삼촌댁으로 나가서 진남포 상공학교에 입학하다
1934년 상공학교장의 소개로 함흥으로 유학을 나가서 운흥리 교회의 김경종 목사(평신대13회 졸업)의 지도를 받다.
1938년 당조카 김현길의 출생(1월 17일)을 보고 가정의 허락을 간청하여 “육신보다는 영원히 사는 길“을 찾고 <교회전도와 민족독립에 헌신을 선언하다. 그는 가문의 막내아들로서 집안일은 당조카에게 맏기고 결혼 보다는 자유를 택하다. 3월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병사하시니 큰 충격을 받다. 9월에는 평양서문밖교회의 장로교 제례회 총회(27회) 결의안 (민족의례건)이 통과되니 청년면려회서 이를 절대반대 하다.
1939년 타오르는 사명감으로 청년면려회와 기독교 청년 동지들이 합세하여 찬송383장<환난과 핍박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등 철야 기도회를 갖다.


1940년 김영주 목사의 천거로 함태영 김재준 김재현 목사의 지시와 후원을 받고 지도자로 활동하다.
1941년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 주재한 미국과 카나다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시킴으로 기독교운동은 방향전환이 필요했다. 강한 권면으로 일본 요꼬하마 공업기술학교에 유학하다.
1943년 반공 황복단 조직에 깊이 관여되어 김구선생의 심복 연락책을 맏고 조만식 장로의 지시대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교신 내왕을 빈번히 하다.
1944년 일본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조국의 독립과 산업발전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마침내 함남노회에서 전도사 안수를 받고 흥남비료공장에 산업선교단으로 파송되다. 조직강화와 산업선교활동은 조만식 장로의 지시와 영향력으로 성공적이었다.


1945년 조선민주당이 고당 조만식 장로의 주도로 조직이 되었으나 일년만에 와해되자 크게 분개하다. 조만식 장로의 천거로 배공단 선전부장으로 임명을 받다.
1946년 공산당이 강양욱으로 하여금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가입을 강요당하다. 가입반대로 철야기도회를 갖다. 11월 3일의 주일날 총선거를 강력히 반대하다.
1947년 조선의 자주독립과 국회민복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찬송가 389장<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제창하고 UN총회의 남복통일문제(9월 23일)를 위해 기도회를 갖다. 이당시 김화식 목사가 주도한 <기독교자유당창립>은 11월 19일에 무산되었고 한경직 목사가 주도한 <기독교사회당>은 신의주에서 시작되어 함흥과 흥남지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의 원형덕 장군은 이때에 무기를 공급하기에이른다. 무기공급은 산업선교단에서도 전달되었다. 김구 선생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948년 함흥과 흥남지역의 강렬한 반탁시위운동의 반대로 흥남에 숨어 있던 곳에서 “교회서 왔습니다”라는 야밤중의 노크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문을 열고 보니 정치보위부 요원들이었다. 이날이 2월 28일로 압송된 날이다. 1949년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김전도사는 회유불가능한 악질분자로 사형언도를 받고 만다.
1950년 공산당의 교역자 납치 및 사살령이 내린(8월)뒤에 함흥형무소에서 처참한 순교를 당하니 그때 나이가 만 30세였다. (그 후예는 김형길은 박사로서 워싱톤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미국 장로교 총회의 선교위원 및 사무장로이다)
1969년 정일권 국무총리는 효창공원의 김구선생 묘소 옆에 10월 9일에 위령탑을 세우니 믿음의 동지가 함께 오늘까지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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