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초장로는 1892년 4월 16일(음)평북 용천군 양광면 용게동에서 정상옥과 김효학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화교회 장로로 평생을 교회 봉사자로서 본이 되었고 교회와 충렬소학교(교회학교)건축 대지를 제공하는 등 진리수호, 교회사수하여 기도하던 중 패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체포, 연행되어 면사무소 뒷산 기슭에서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의주향교 한학수학 면서기 토지측량기사 광화학원 설립 독립운동가
의주 향교에서 한학을 수학 논어 사서삼경을 배우고 토지층량기법을 익혔고 중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고 일본신문을 정독할 수 있었다. 면서기로 주민들과 교제하고 믿음의 형제들과도 교분을 맺기도 하였다.
20대 중반에 이윤옥 조사(전도사)의 인도로 예수를 영접한 최초의 8,9인 신자중 한사람이었다. 광화교회 운영유지에 헌신적인 봉사로 당시 강화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는 작은 예수라 불리었다. 몸된 교회를 세우고 미션스쿨 광화학원 설립운영하고 광화교회 회계집사로 관리 운영을 도맡아 했다. 건너방 두칸에 야학교를 설립하고 광화일대 문맹퇴치와 신식학문을 습득할 기회를 제공했다.
1930년에 안수집사가 되어 회계집사로 교회운영과 광화학원 운영을 도맡다시피 했고 1936년 4월에 용천노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송병조목사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이어가며 독립군 군자금도 제공하는 등 광화교회의 봉사와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신의주교회 윤하영목사가 일제의 종교간섭을 피해 백마에서 은둔생활을 할 때 몇년간 쌀을 무상으로 공급하였고 많은 교역자들의 목회를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섬기며 교회재정이 어려울때는 사재를 털어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화학원을 통해 한글을 가르치고 농촌 젊은이들의 문맹을 깨우치는데 심혈을 쏟았고 주일학교 반사도 장로로 점찍힐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의 신앙실천 생활은 동리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감명을 주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사람을 대하던지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진지하고 성실할 뿐 아니라 정의감이 강한 외유내강한 장로로 용의주에서는 '초장로'로 소문이 나 있었고 광화라고 하는 농촌에서는 모든 사람의 존경과 경외감을 사는 대부와도 같았다. 도박으로 주재소에 갇힌 젊은이들을 시말서를 써주고 풀어주며 그 부모들에게 자식들을 똑바로 가르치라고 일장 훈시를 하고 보낼 정도로 경찰들도 그의 인품을 존경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상비약이 준비되어 있었고 위급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도와주고 직접 중병 든 이웃을 살려준 일도 있다. 7칸 큰 기와집을 팔고 4칸짜리 작은 집으로 이사한는 등 생활위상을 낮추어 사는 정장로는 4칸짜리 기와집을 2칸에 사는 주일학교 교사에게 또 다시 주고 자기는 그 두칸짜리 초가집에 이사해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해방 후 소지주가 숙청되는 상황에서도 정장로를 숙청하지 않던 공산주의는 6.25 동족상잔이 일어나고 1950년 10월 1일 북한 공산군이 퇴각하고 국군이 북진을 하게 되자 공산군은 용의주 교역자들을 연행하는 중 정장로도 연행하여 면사무소 뒷산 기슭에서 처형했으니 그의 나이 58세였다.
유족은 맏손자 정일홍(기업가로 대성) 둘재손자 정일선 목사 셋째손자 정일청(중소기업사장) 등 3대에 걸쳐 몸된 교회를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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