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명은 1919년 평북 태천군 서면 신송리에서 아버지 주관익과 어머니 이괄달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는 주민들을 괴롭혀 이민길에 오르게 했다. 주재명은 과한세금, 사상범으로 투옥하는 등 수탈에 견디지 못하고 북한으로 이주한 주관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주철영중학을 거쳐 봉천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선천 안산교회와 가물남 마산교회를 시무하면서 공산당에게 수난 하였고, 1948년 월남하여 한국전쟁 때 마포 서교동교회에서 공산군에게 납북되어 강계에서 살해되었다.
만주 철영중학교 졸업. 1944년 봉천신학교 졸업. 영구교회. 안산교회. 마산교회. 서교동교회.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갔다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만주에서 철영중학교를 졸업한 후 영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봉천신학교를 1944년에 졸업했다. 그는 목사의 성격을 나타내는 신학교시절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포용하는 넓은 가슴은 방학때면 오갈데 없는 급우들을 집으로 데려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풍족하게 한식구처럼 살아 방학이면 항상 잔치집처럼 들끓었다.부친이 일직 돌아가시자 장남인 그는 4남매 동생들과 모친 연로한 할머니까지 책임을 지고 먹여살려야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후 90세 할머니와 온가족들을 데리고 귀국하여 평북 선천으로 돌아왔다. 귀국하여서 안산교회를 시무하면서 평북노회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11월 3일 주일선거 불용, 기독교도연맹가입 거부한 이유로 1947년 보안서에 끌려가서 협박을 받고 2차로 끌려가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고막이 파괴되고 얼굴과 온몸에 피멍이 들어 구렁이 감은 듯 맞고 실신하여 업혀나왔을때 90노모는 충격으로 숨을 거두었으니 얻어맞고 업혀들오는 모습은 참아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조모의 장례를 치룬 그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안산교회를 떠나 마산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마산교회에서 막내 동생 주계명의 중학교 입학 불합격 통보를 받자 더 이상 목사들이 북한에서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구나 하고 1949년 7월 단신월남하여 서교동교회를 목회하면서 밤에는 삼각산에 들어가 기도하고 낮에는 공원에 나타나 스데반과 같은 사자후를 토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우렸다.
주목사는 주어진 생을 주님 위해 적극적으로 살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기도생활에 정진했고 전도생활에 적극성을 띠었다. 삼각산에 들어가 기도로 부르짖고 낮이면 파고다 공원으로 나와 노방전도를 했다. 월남 후 2년 반만에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모두 피난가고 피난을 권했지만 "북에서 성도 다 떼어놓고 온 내가 또 어디까지 도망치겠소. 이제 나는 여기 남아서 교회를 사수하겠소!" 그는 적 치하에서도 주일이면 예배를 드렸다.
그것도 몇주일뿐 내무서에서 허락하지를 않았다. 교인은 떠나고 교회당 문은 닺히고 목사의 가족은 먹을 양식이 없었다. 그는 리어카를 끌며 아현동 굴레방 다리로 나가 배추와 야채를 받아다 남대문시장에 팔아 끼니를 이어가며 교회를 사수하다가 8월 중순 내무서원의 소환장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우익인사와 함께 납북돼 끌려가 소식이 끊겼고 1953년 주재명목사의 순교소식이 동아일보 보도에 실렸다.
남쪽에서 끌려온 납북인사들 중에는 강계교화소에 수감돼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공산당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을 처형시켰다. 그중에 주재명 목사도 끼어있었다. 서교동교회는 1986년부터 주재명목사 순교기념 신학 공개강좌를 연행사로 갖고 있다.
주목사의 유족으로는 주계명목사(총회총무 역임)와 충남 온양에 있는 소천리 기도원 원장으로 있는 부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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