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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선교정보기타  작성일  2001-05-21
 제목  [종교기행] "슬라브족의 사도" 키릴과 메소디우스
 주제어키워드  종교기행 슬라브족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5180  추천수  19
## 사도형제는 사라졌지만 그들 닮은 성당은 남아 ##



가톨릭, 개신교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인 정교회(Orthodox

Church)는 예수 그리스도 사후 형성된 초대 교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의

5개 관구 중에서 로마를 제외한 4개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로마 교회의 수장권을 인정하지 않고 각 지역 교회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수평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중동과 소아시아를 기반으로 하던 정교회는 이들 지역이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이제는 ‘슬라브족의 종교’라는 색채가 짙다. 가장

큰 정교회 공동체인 러시아 정교회를 비롯해서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그리스 정교회를 제외한 규모가 큰 정교회 대부분이

슬라브족이기 때문이다.



슬라브족이 정교회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의

선교사인 키릴(827~869)과 메소디우스(825~884) 형제였다.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 출신인 이들은 세르비아의 슬라브족에게 정교회 신앙을 전했고

슬라브 문자를 만드는 등 슬라브족의 종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슬라브족의 사도’라고 불린다.



지난달 9일 테살로니키를 찾았을 때는 마침 그리스 총선 전날이었다.

좌파 집권당과 우파 야당이 지지율 차이 1% 미만으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거리에는 막바지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길을 따라

걷노라니 이 곳이 종교도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시내 도처에

고색 창연한 비잔틴 양식의 정교회 예배당들이 남아 있었고 성화와 성상을

파는 가게들도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길가의

기도소에 들러 촛불을 켜 놓고 기도 올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테살로니키는 에게해 한복판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매제로 그의 사후 정권을 장악한 카산드로스는 에게해와 발칸반도를 연결하는

지점에 신도시를 세우고 부인의 이름을 붙였다. 테살로니키는 이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점차 마케도니아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테살로니키에 그리스도교를 처음 전한 것은 ‘이방인(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었다. 바울은 서기 50년경 이곳에 도착하여 전도활동을 벌였고 그가

테살로니키 신자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는 신약성서에 포함돼 있다.



테살로니키는 동로마 제국에 들어서 더욱 중요해졌고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제2의 도시로 성장했다. 많은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워졌으며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선교사들이 잇달아 배출됐다. 오늘날에도 테살로니키는 정교회의

신학 연구 및 성직자 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군 제독의 아들로 태어난 키릴과 메소디우스는 테살로니키의 국제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성장했다. 당시 테살로니키에는 여러 곳에서

상인과 학자, 종교인들이 모여들었으며 이들 형제는 자연스럽게 여러 개의

외국어를 배울 기회를 가졌다. 이런 외국어 능력은 훗날 슬라브족 선교에

큰 도움이 됐다.



키릴과 메소디우스는 청년기에 성직에 종사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들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키릴은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당대 최고의 신학자이었던

포티우스의 제자가 됐고 메소디우스는 올림포스 산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두각을 나타낸 키릴은 중동 지역의 선교 사명을 맡았다.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신학교 교수로 재임 중이던

키릴과 한 수도원을 책임지고 있던 메소디우스에게 ‘슬라브족의 선교’라는

새로운 사명이 떨어진 것은 862년이었다. 오늘날의 세르비아 지역에 들어선

대모라비아의 지배자 로스티슬라프가 동로마 제국에 선교사를 요청했고,

이들 형제가 적임자로 선발됐던 것이다.



그러나 대모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키릴과 메소디우스는 얼마 후 로마 교회를 따르는 게르만족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 추방되고 말았다. 강력한 중앙집권과 라틴어 미사를 고집하던

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방침에 따라 현지 언어로 미사를 하던

이들 형제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활동을 해명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고 키릴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메소디우스는 혼자서

모라비아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5년이나 더 슬라브족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이들 형제가 길러낸 많은 선교사들은 발칸반도 뿐 아니라

보헤미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으로 뻗어나가 슬라브족 전체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키릴과 메소디우스는 모두 타향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테살로니키에는

특별한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정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이들 형제에

대한 테살로니키 사람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테살로니키에 관한 책은 키릴과

메소디우스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며, 테살로니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테살로니키 사람들은 10여년 전 두 사람을 기념하는 성당을 새로 지었다.

테살로니키 신시가지 해변가에 세워진 ‘키릴과 메소디우스 성당’은 가운데

황금색 돔을 네 개의 작은 돔이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정교회 양식이다.

성당 안에는 두 형제의 초상화가 제단 왼쪽에 놓여 있을 뿐이지만 이 도시의

대표적인 인물을 위한 기념물이라 곧 명소가 되었다.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선교 활동이 특히 높이 평가받는 것은 슬라브어의

문자를 만들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들은 아직 문자가 없던 슬라브족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위해 새 문자를 만들었고 그 문자로 성서를 번역했다.

그 때문에 슬라브족은 다른 유럽 민족들보다 700년이나 빨리 자기 문자로 된

성서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그리스 문자에 바탕을 둔 이 문자는 ‘키릴

문자’라고 불리며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오늘날

사용되는 대부분 슬라브 문자의 원형이 됐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신대륙에 선교 활동을 벌일 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토착문화와 마찰을 빚었다. 현지인 언어에

적합한 문자를 새로 만들어가면서까지 토착화를 추구했던 키릴과

메소디우스 형제의 현명함이 결국 화목한 정교회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테살로니키(그리스)=리선민기자 / sm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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