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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06-21
 제목  메리 맥리어드 배튠
 주제어키워드  주님의 사도들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407  추천수  23
“야, 그 책 좀 내려놔라! 읽을 줄도 모르는게!”

여자애들이 놀리면서 빈정대었다. 그 애들의 조롱하는 웃음소리 때문에 메리의 귀는 모멸감으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 백인 친구 계집애들의 말이 옳았다. 어쨌든 메리는 아직 읽을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배울 수는 있었다. 왜 못 배우겠는가?



검둥이 계집애라도…



메리 맥리어드 베튠은 샘과 팻시 맥리어드의 17자녀 중 15째로 태어났다. 당시에 엠마 윌슨이 그 지역에 선교학교를 열기 전에는 흑인 어린이들은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맥리어드 씨는 여력이 없어서 자녀 중 한 명만 윌슨 선생님의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누가 그 한 명인지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였고, 메리가 선택되었다. 그 학교에서 공부를 마칠 때 쯤 되었을 때 메리 크리스만이 그를 후원하여 스코티아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메리는 그의 일생의 전기(轉機)가 되는 한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요한복음 3:16절에 나오는 “누구든지”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검둥이 계집애라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기회를 가졌다고 보신다는 것이다. 1894년에 스코티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무디성경학교에 들어간 메리는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느꼈었지만 흑인 여성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후원하겠다는 선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메리는 남 캐롤라이나의 섬터로 돌아와서 동료 교사인 앨버터스 베튠을 만나 결혼했다. 1899년에 그들은 플로리다의 팔랏카로 이사하여 선교학교를 개교하였고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 수년간 가정을 돌보고 선교학교에서 가르치고 교도소를 방문하면서 세월을 보내던 중 만나게 된 한 감리교 순회 목사를 통해 최악기의 노예 생활을 방불케하는 데이토나(플로리다 소재:편집자 주)의 상황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는 못 쓰는 매트와 카펫트, 침대 등을 모아서 긴 의자들을 만들었고 딱총나무 열매로 잉크를 만들어 썼다. 1904년 10월 여자애 다섯과 메리의 아들을 시작으로 선교학교가 개교되었다. 그들은 시편 23편을 암송하였고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를 찬송하며 인도를 구하였다. 메리는 온 학교 안에 이 한 가지 메시지를 쓴 표시판들을 붙여 놓았다. “생각하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



메리는 보증금 5달러, 매월 5달러를 내는 폐장된 쓰레기 하치장을 샀는데 그것이 바로 “헬홀(지옥)”학교였다. 시의원들은 흑인 어린이들, 특히 여자애들이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좀 알자고 질문했었다. 메리의 대답은 언제나 동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종 아침 일찍 고기를 잡으러 나갔고 잡은 고기의 살을 발라서 튀기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철도 근로자들에게 팔았다. 메리는 학교의 임대료를 내기위해 개인적으로 수천 개의 고구마 파이를 구워서 팔았다. 그들은 다음 식사는 또 어떻게 공급될 것인지 모르면서 살았지만 메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했다.



“주 너를 지키리”



그러나 메리가 겪었던 도전들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KKK단의 위협이었다. 제19차 수정 헌법 비준으로 여성들도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1920년에 메리는 맹렬히 투표자 등록운동을 이끌었는데 그것이 KKK단의 공격을 촉발한 것이다.

“더 이상 도망치지 말아라! 얼굴을 똑바로 들어라. 누구를 만나든지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누구에게나 피부색으로 인하여 사과하지 말아라”

1920년 시장 선거 전날 밤, 테러단이 학교 광장으로 밀려들어왔다. 공포가 만연한 가운데 테러단의 방문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그들의 위협전술을 잘 알고 있었던 메리는 모든 불을 끌 것을 명령하였다. 잠깐 동안은 학교와 주변이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 어둠에 싸여 감시받게 된 것은 바로 테러단원들이었다. 메리는 잠시 기다렸다가 기숙사 꼭대기에 있는 감시등을 일제히 켜서 테러단을 밝은 빛에 휩싸이게 하였다.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 때 어디선가 한 어린 학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공포에 휩싸였던 학생들이 점차 그 노래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떨면서 불렀으나 갈수록 확신을 가지고 그 합창에 가세했다. 놀라서 혼돈에 빠진 테러단은 올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모습으로 후퇴하였다.

투표당일 아침 일찍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흑인들은 모든 백인들이 투표하기까지 투표를 할 수 없었다. 메리는 하루종일 그 줄 옆을 걸어다니고 시원한 레몬수를 나르면서 흑인 유권자들을 독려하여 그들이 대열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였다. 결국 데이토나의 흑인 시민들이 투표하였다. 그 결과 테러단이 지지한 시장 후보가 지고 말았다. 이 소식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메리는 “KKK단을 길들인 교사”로 유명해졌다.



선교사적 삶



학교는 성장을 거듭하였고 1923년에 쿡맨 재단과 합병한 후 1929년에는 베튠-쿡맨 대학으로 개명하였다. 그녀는 흑인여성 시민단체 조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사업을 통하여 친구가 된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의 천거로 국가 청소년 조정부 흑인문제 담당관으로 임명됨으로써 메리는 연방기구의 장이 된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고용차별에 대항하는 프로그램들을 창출하고 기업들을 설득하여 흑인을 고용하게 하고 정부기관에서의 차별철폐, 흑인들에게 불리한 정부 정책의 시행방지 등의 일을 추진하였다.

69세에 메리는 정부의 직책을 떠나 흑인여성 국민회의와 베튠-쿡맨 대학에 전념했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지 못했으나 그의 학생들은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자기의 인생 철학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내 민족에 대한 신앙, 내 친구들에 대한 신앙, 그리고 메리 맥리어드 베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1955년 마침내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던 교정에 묻히었다. 수천의 베튠-쿡맨 대학 졸업생들은 그의 “사랑의 유언”을 암송했고 또 그대로 살았다.



“사랑하십시오/소망을 가지십시오/서로에 대한 신뢰를 계발하십시오/교육에 대한 갈망을 가지십시오/권력을 바르게 사용하십시오/믿음을 가지십시오/인종에 대한 존엄성을 가지십시오/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소원하십시오/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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