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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작성일  2000-07-31
 제목  남편을 전도하는 이들
 주제어키워드  김학진목사님글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131  추천수  8
동대문 교회의 여성신자들은 자기의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 힘쓰기 시작했다. 성경을 사다가 남편에게 읽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남편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뿐만아니라 성경을 찢어버리기 일쑤였다. 반대로 어떤 이는 이런 교리를 어디가야 남자들도 배울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동대문 기도처에는 남성들의 기도처를 따로 준비해 놓았다. 거기서 남자들이 나오면 기도했고, 남자반을 형성했다. 뿐만아니라 각기 따로 성경 공부와 예배를 가졌다. 남자반은 스크렌튼 박사와 존스 목사가 인도했고, 여자반은 스크렌튼 대부인과 로드 웨일러 부인이 이경숙 교사와 함께 인도했다. 이때 일을 스크렌튼 선교사가 미국 해외 여선교회에 보고한 글이 있다.



「일년 쯤 한 어머니와 며느리가 병원에 왔다. 그들은 책 한권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 나이가 든 부인의 남편이 그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몇달 후 어디서 이런 교리를 더 배울 수 있는가를 물으러 왔다. 교회에서는 그 부인들을 부인집회에 참예하도록 인도했고, 남자는 남자들의 집회에 참예케 인도했다. 그 세사람은 그 후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규적인 집회에 꼭 참석하였고 교회에서는 그들을 학습인으로 받았다. 그 후부터 동대문 교회에는 남녀가 모두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1892년 9월 경이었다. 그러나 남녀가 한 곳에 앉을 수 없어서 같은 시간에 모이되 장소만 달리했다.

지난 해 1892년 9월 우리는 선교본부 정동에서 3마일 떨어진 이 도시 동편에서 또 사업을 시작했다. 스크렌튼 박사와 여성들이 베란다와 안뜰에서 모이는 동안 집밖에서는 남성들이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그 중간에 병풍으로 칸을 막았다. 지금 남녀들이 자유롭게 한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이같은 변화가 단계적으로 있었음을 알게 한다.」



볼드윈 채플로 불리우는 동대문 예배실의 건축의 특징은 남녀가 한곳에 앉을 수 있게 건축한 점이다. 그러나 아직 남녀동석은 사회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 보이지않게 병풍으로 중간을 막아 놓았다. 그러나 병풍을 치고라도 한곳에 남녀가 앉는다는 것은 무척 진보된 방법이었다.

남녀신도들은 서로 바라볼 수 없었으나 설교자는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외국선교사들의 얼굴을 처음보는 여자들이 놀라서 뛰쳐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의 신도들은 이렇게 모이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예기>에는 「부인은 낮에 달을 거닐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곧 부인도 오래 방에 가두는 일이다. 또 「부인은 까닭없이 중문을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 혹 뜰에서 노닐지라도 안뜰을 넘어서 바깥뜰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말라는 말이다. 뿐만아니라 「여자가 문을 나서면 반드시 낯을 가릴지라」고 했다. 이것은 곧 부득이 문을 나서게 되더라도 남에게 낯을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동월의 <조선부>에 나타난 것을 보자.



「여자가 살적 머리도 그 이름 가렸으니 머리에 꾸민 여러 치장보이지 않으며 머리에다 흰 것을 둥글게 썼으니 눈썹과 눈두덩이 눌러있네. 부귀한 이 나드리일세. 검은 비단으로 온 몸을 감싸매 비천한 이는 민다리에 흰치마 입었더라」



부녀가 밖으로 나갈때 입모를 쓰되 앞창을 젖히고 부채로 낯을 가리었으나 조선조 태종 이후로는 부녀가 부채를 지니는 일마저 금하고 염모를 드리워 낯을 가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부녀 내외법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이들로 인해 새롭게 달라졌다.

일반 여자는 모두 남녀공학인 보통학교에 들어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아래옷으로는 무릎까지만 가는 짧은 치마를 입으며, 머리는 예쁜 더벅머리를 흰칠하여 올리고 걸음걸이는 생기가 났다. 또 일반 부녀들은 번거롭게 옷같은 일체의 기구를 폐하고 박쥐양산으로 대신하고 푸릇 놀이터나 음악을 연주할 공회당같은 곳에 여자가 반 수 이상 차지하게 되었다. 부인 상점과 간판이 곳곳에 걸리고 여자 정구경기가 때때로 개최되었다. 뿐만아니라 여권론을 주장하는 이가 있어서 대중을 모아놓고 연설하며 여자가 앞장서자는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갈채를 받게했다. 심지어 머리를 잘라 어깨에 가지런히 드리웠으니 이것이 곧 외국풍에 물든 것이다. 길을 갈때 어린이들은 이를 가리켜 ‘단발 미인’이라고 불렀다.



동대문 매일 여학교



매일학교라는 명칭은 주일학교와는 달리 날마다 모여 공부하는 학교라는 뜻이다. 선교초기의 매일학교를 교회의 산실 또는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교육기관으로 선교와 적절한 교육운동이었다.

동대문에 매일학교가 설립된 것은 1982년 미국에 선교회본부 총무인 볼드윈 부인이 거액의 헌금을 보내주어 동대문에 시료소를 확충하고 예배실을 건축하면서 학교교실을 마련한 때였다. 본래 매일학교의 목적을 여러가지로 볼 수 있겠다. 첫째는 선교의 전초지로서의 교육이었다. 지도자 양성과의 애국계몽의 교육이었다. 특히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선교사의 매일학교, 아현매일학교, 공주매일학교 등을 세웠다. 1902년 존스 선교사 보고에 의하면 11개 남자 매일학교의 학생이 약 200명, 소녀매일학교 19개 학교의 학생이 약 200명이었다고 했다. 동대문 지역에는 볼드윈 부인의 여자교육기관이 세워졌으며 1900년대에는 염창, 창천, 공덕, 왕십리, 용두리 등 여러지역의 매일학교가 많이 생겨났다. 1995년에는 매일학교가 모두 140여 곳이나 되었다. 이같은 매일학교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공주지방에서 변홍규, 조병옥, 개성 배의학교에서 신공수 목사, 진남포 삼승학교에서 한석원 목사, 철원 삼양학교에서 조신일 목사 등 많은 인재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힐버트 선교사가 동대문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1893년 감리교 경영의 삼문출판사의 지배인으로 임명받아 다시 한국에 온 그는 한국 출판문화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삼문출판사를 통해 성경을 비롯해 기독교 서적을 출판함으로써 한국교회문화운동에 기초를 닦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 고유 문화를 세계로 소개하는 일과 독립운동에 한국인 이상으로 힘을 쏟았다. 그는 “나는 죽어서 영국 웨스트 민스터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더욱 소망한다.”고 말할만큼 우리나라와 한민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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