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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1-02-28
 제목  <기획> 3.1절 혼 전덕기 목사
 주제어키워드  3.1절 혼 전덕기 목사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2627  추천수  0
기획/



3.1절 혼 전덕기 목사, 애국심과 신앙심으로 민족혼 일깨워



진수철 목사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장)



상동교회는 남대문 시장, 소시민과 복음의 조화, 이것은 상동교회가 선교사 스크랜튼에 의해 설립될 당시부터 인연 맺어진 선교의 필연이었다. 남대문 앞 새로나 백화점 도로는 상인들과 손님들로 언제든 북새통을 이룬다. 리어커위에 좌판을 올려놓고 옷을 팔고 있는 젊은 상인은 덩실덩실 춤을추며 호객을 하고 있다.

“원피스가 싸요. 통피스 하나에 5천원. 싸면 사요. 못사면 후회해요. 싸요 싸요 원피스가 싸요.” 손님들은 우르르 리어커 주변으로 몰려들어 옷을 고르고 있다. 낙엽처럼 지천으로 쌓인 옷들이 금새 없어져 버리고 만다. 상동교회는 개척 2년때부터 야소교 사교(邪敎)라는 민중의 뿌리박힌 의식에도 불구하고 1백여명의 교인들로 들어찼다.

이는 병든 서민들이 헌신적인 의료 선교사들의 치료를 받고 감격하여 하나님 교회로 찾아나온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병원이 정동에서 정식으로 상동으로 옮겨오고부터 교회가 병자들로 들어차자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 달성궁으로 이전하고 부터는 교인이 3백여명으로 급격히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로 자리잡아 가던 상동교회는 드디어 1900년 7월에는 안식년을 맞아 일시 귀국했던 스크랜튼 대 부인이 4천불을 모금해 오므로 교회건축이 시작되어, 온 교우들의 정성어린 헌금을 합쳐 경성에서 가장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해 내기에 이르렀다.

스크랜튼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래 열정적인 믿음으로 교회를 섬겼던 전덕기(全德基)는 교회 건축에도 앞장섰고 1901년 교회건축을 계기로 속장에서 권사로 임명되었으며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상동교회 역사를 쓰면서 전덕기를 빼뜨릴 수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상동교회 담임 교역자로 있으면서 상동교회를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키운 애국지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담임목사인 스크랜튼을 도와 전도사직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민족운동을 병행해 나간 것이다.

그가 얼마나 힘없는 민중을 소중히 돌아보았는가는 그가 죽어 그의 장례가 상동교회장으로 치러 질 때 남대문 인근의 서민들이 몰려나와 전목사의 관을 부여안고 통곡을 했을뿐 아니라 창녀 깡패들까지 조복을 입고 장지까지 따라 나섰다는 것이 입증한다. 그는 평소 “스크랜튼 목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했다. !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려고 한 사부 스크랜튼을 닮고자 한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전덕기는 교회에 나막신과 마른 쑥한 웅쿰, 약식관을 준비해 놓게 했다.

이는 죽은 사람이 있으면 담임목사가 친히 뛰어가 염습해 장례를 치러 주기 위함이었다. 1900년대초, 한국 사회의 상황은 불결한 주변환경으로 장질부사에 걸려 죽는 환자수는 부지기수였다. 의료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음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너무 가난하다보니 의료비가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해 죽는 자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때는 장질부사에 걸리게 되면 백이면 백 죽었고, 전염성도 빨라 가족이 죽어도 무서워서 방치해 두던 시절이었다.

그는 목회를 하되 주변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하는 목회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민중속에 뛰어들어 생명을 바치는 목회를 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목회는 풍요로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나 민족도 목회자가 목회할 어린 양으로 본 것이다. 그는 전도사 시절 상동교회내에 엡 청년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회장이 되어 청년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1905년 엡청년회가 활동을 시작한때 운명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애국지사 전덕기가 이를 좌시만 할 리가 없었다.

그는 엡청년회를 중심으로 ‘을사보호조약부 효상소운동’을 벌였다. 1905년 7월 가쯔라 태프트 밀약이 성립되었다. 가쯔라 태프트 밀약이란 미국이 필리핀을 먹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합병함을 눈감아 준다는 밀약이었다. 그들의 묵계는 현실화되어 그해 11월 17일 일본 군대가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었다.

전덕기는 회원들로 하여금 도끼를 들고 대한문으로 나아가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게 했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탈취하여 우리 2천만 신민을 노예로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맹세하고 싸우기로 결의한다.”

무효상소 조가 종로로 나아가 저항하며 연설을 해대자 일경은 군대를 동원해 모조리 무효상소조를 체포해 버렸다. 2조, 3조, 4조, 계속해서 거리로 나아가 저항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민중의 호응도 냉담했다.

전덕기는 이때 힘없는 민족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를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독립운동의 방향을 바꾸기에 이른다. 때마침 일제는 스크랜튼을 압력해 웹 청년회를 해산시키게 했다.

전덕기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 교육사업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는 상동교회에 기 조직이 되어있는 공옥학교를 육성 발전시키는 반면 상동청년학원을 개원해 민족교육에 힘을 쏟게된다. 공옥학교가 초등학교였다면 청년학원은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전덕기 목사의 활동영역은 교회내에서만 한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본이란 불한당에게 치도곤으로 얻어맞고 쓰러져있는 조국 조선을 건지기 위해서는 무력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전덕기에게서 발견되는 혁명적 면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목회자로서 영적인 황홀경만을 헤메는 신비주의에 몰입하기 보다 현실 참여쪽에 비중을 두었다.

술취한 운전?

차를 잘못 몰아 행인을 치어 죽이게 된다면 권총을 발사해서라도 저지를 악을 막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상동교회를 개방하고 그를 찾아오는 모든 인사들을 표용했다. 그는 구지 신 불신을 따지지도 않았다. 전목사를 찾아오는 사람중에는 신앙인도 있었지만 태산같은 그의 지도력에 감화되어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이들을 수용했다. 독립협회 지도자들 중 그와 친분 관계가 깊었던 이들의 명단을 보면 더욱 확연해 진다. 김구, 이동휘, 이동영, 이준, 노백린, 안태국, 남궁억, 신채호, 최광옥, 차병수, 이승훈, 이상설, 최나선, 이상재, 최재학, 김진호, 양기탁, 주시경, 이용태, 윤치호, 이희영, 유일선, 이필주, 이승만이 그들이다. 전덕기 목사가 상동 청년학원을 운영하면서 쟁쟁한 애국지사들을 교사로 초빙해 강사를 시키자 팔도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 운동에 동조하는 뜻있는 동지들은 모르게 헌성금도 보내왔지만 한 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 뒤따랐다.

그는 청년학원을 경영하고 부터는 교회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도 개인적으로 쓰지 못하고 학교 운영비로 채워 넣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죽기까지 상동청년학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청년학원이 민족의 운명을 책임질 독립운동가를 기르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상동 청년학원은 여섯가지 면에서 활동했다. 첫째는 청년학원 교육을 통해 한글 보급운동을 편 것이고, 둘째는 조선사를 강의하므로 민족의식을 고취 시켰고 셋째 외국어 교육을 통해 세계시민을 육성하려 한 것이며 넷째 군사력을 실시하여 건강한 인격, 애국적 시민을 양성하려 한 것이다. 다섯째 신문화 운동을 전개해 음악교육은 물론 연극 활동도 강화했다. 여섯째 지도자의 자기 수양을 위해 종교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1907년 화란의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고종황제를 경운궁에 억류 시키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 시키고 있을 때 이위종, 이상설, 이준을 파견시켜 을사보호 조약은 한국황제의 뜻이 아니고 일본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기에 을사보호조약은 파기되어야 한다는 선언문이 전해졌다. 통쾌한 쾌거였다. 이 일은 누가 해 냈는가? 바로 우리의 전덕기 목사가 해낸 것이다.

이 무렵 전덕기는 안창호선생이 미국에서 귀국함을 계기로 독립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신민회는 철저한 비밀 결사단체로서 힘을 키우다가 드디어 1911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일제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내기에 이른다. 전목사는 바로 신민회 재무총책을 맡고 있었고 평북총감 이승훈, 평남총감 안창호, 황해총감 김구, 함경총감 이동휘와 함께 중앙총감이란 중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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