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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매일선교소식  작성일  2002-06-16
 제목  선교연구 - 한국의 첫 복음전령 귀츨라프 선교사
 주제어키워드  선교연구 - 한국의 첫 복음전령 귀츨라프 선교사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5665  추천수  1
160년전 고대도에 첫 '복음전령' - 선교사 귀츨라프
오전 9시30분 서울역을 떠나는 장항선 열차. 드문드문하던 승객들이 영등포역에서는 자리 를 거의
다 메웠다. 차창 밖은 오늘따라 안개로 뿌옇다. 1백60년의 시간을 거슬러 서해안의 한 조그만 섬을 찾
아가는 길. 마치 타임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와 고대도(古代
島).정확히 1백59년전 한국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와 그가 한달간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던 섬이
다.


암허스트호 통역 겸 의사
대천항서 출발한 70t급 연안여객선 한일호는 원산도 안면도 영목을 경우, 1시간만에 목적 지 고대도
에 닿는다. 섬 등성이에 우뚝솟은 십자가 탑이 첫눈에 들어온다. 1백여 가구에 주 민 4백여명. 면적 26
만평. 보령군 통계에 따르면 가구당 월평균소득 3백여만원. 봄 새우잡이, 가을 멸치잡이 등이 주업으
로 소득이 꽤 높다. 국민학교 보건지소 각 1곳, 10년전 낙도선교회의 주선으로 곽길보 목사가 개척한
고대도교 회(지금은 이인환목사 시무)가 있다. 1832년7월23일, 이섬 앞바다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의 1천t급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가 나 타났다. 당시 고대도 사람들의 눈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로 보
였으리라.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한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 관민(官民)의 통상에 관한 관심을 살필
목적으로 중국 연안을 거처 한국까지 온 이 배에는 독일 출신의 영국선교사 귀츨라프가 통 역 겸 선의
(船醫)로 동승하고 있었다.

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가면 그가 남긴 암허스트호 항해기(영문)을 볼수 있는데, 조선 서해
안 기사는 극히 적은 부분이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엿볼수 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지만 주민은 얼마없고 개발도
안되었다…그만큼 밉살스런 쇄국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데…" 당시 조선은 순조
(純祖·재위 1800~34) 통치 말년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수십년간 엄청난 박해를 받고 김조순을 중심으
로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였다. 정치는 문란해지고 민생 이 도탄에 빠져 각종 참설(讖說)이 유행
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항해기도 "이 왕국은 자체적으로 독립하여 통치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나 조
공을 바치며 중 국에 복종하여 왔다. 중국은 이 나라의 여러 파벌싸움을 조장하였고 이로써 이 왕국
은 미개 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고대도에 정박한 귀츨라프 일행은 홍주목의 관리인듯한 지방관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
하여 국왕에게 통상슷원 서한과 유리그릇 옥양모 모직물 등 선물을 보낼 수 있었 다. 이 선물 중엔 성
서 한질과 전도문서 등도 들어 있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접촉했
다. 배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전도문서를 나누어주기도 했고 지방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관리들도 호의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주민들은 국법에 어긋난다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 았다. 피
부과 안과 전문의사였던 귀출라프는 주민들에게 약도 나누어주고 받겠다는 사람에 게는 전도문서를
곁들여 복음서를 주었는데 관리들은 이를 금지시켰다. 이를 두고 귀츨라프는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
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 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리라' 적고 있 다. 또 그는 주민들에 대해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이를 좋
아한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걸 질투하리만치 편협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겉으로 보기에
는 냉담한 것 같으나 이는 정부의 강요 때문이며 일대일로 대할 땐 누구나 인정스럽다'고 기록하고 있
다.

귀츨라프 일행이 천주교 신자로 추정되는 '양이'라는 사람과 만난 일화가 당시 상황을 단 적으로 보여
준다. 양이는 그들에게 한글 자모를 써주었고 귀츨라프는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어 그것을 한글 로
베끼게 했는데 양이가 베끼면서 자꾸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한 것으로 보아 관헌에게 발각되면 목
이 달아난다는 암시인 듯 했다.


천주교신자 '양이' 만남
이 때 천주교 신자들은 귀츨라프 일행에게 어느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여러번 물 었다. 천주
교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충청도 해안에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빛을 갈망했던 우리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엿보인다. 8월초 한양에서 회신이 올 때가 임박하자 귀츨라프 일행에 대
한 관리들의 태도는 점차 굳 어져 갔다. 8월9일 ,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도로 돌려주
며 중국 황제의 허 락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귀츨라프 등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
이 아님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관리들로 부터 약속받은 식량 등을 공급받은 후 결국
이 미지의 나라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한달 남짓한 귀츨라프의 복음사역은 일단 막
을 내리게 된다.


한양특사 통상불가 통보
귀츨라프의 한국사역은 가시적 성과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한 당
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날 바로 1천만 한국 기독교인의 믿음의
뿌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암허스트호의 조선방문 목적에서 볼 때 한 개인으로서의 귀츨라프는 본의
아니게 서구의 동양침략 전위 역할을 일부 감당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귀츨라프
가 아 닌 복음사역자로서의 귀츨라프의 염원은 오늘날 여전히 귀 기울여 볼만하다. "어쨌든 조선방문
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 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
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 야 말 것이다. …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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